(2013년 블로그에 썼던 리뷰입니다)
작년에 고전문학으로썬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이 둘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의 국민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의 국민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올해는 영화덕에 ‘위대한 게츠비’가 엄청나게 팔리는 모양이지만 이 두작품은 작년에 딱히 그런 이슈가 있었던것도 아니었으니 말그대로 이례적이었다.
이 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워낙에 제목도 멋들어져 패러디도 많이된 작품인지라 읽지 않았어도 아는채는 하는 작품순위가 있다면 최상위권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런던이나 파리는 뭔가 너무 흔한 느낌인데 체코 프라하 하면 굉장히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떠오르면서 이때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 하나 읊어주면 저절로 프라하 공항 어딘가는 찍고 온듯한 허세가 생기고 말이지.
여튼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만나기전 그 이름에 대한 내 느낌이 이러했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만난 뒤로는 다른 독자들이 흔히 그랬듯, “아니 노벨상은 왜 이런 위대한 작가를 외면하는가?” 라는 의문이 절로 들고 그의 열렬한 애독자가 되기 이르른다.
해서 쿤데라의 유명한 작품들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하고 첫번째로 그의 처녀작이라는 농담을 먼저 꺼내들었다.
이작품 역시 거대한 역사속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는 점과 몇몇 주인공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그들간의 관계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같은 구성이며 그 속에서 깊은 철학적 성찰과 고민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역시 쿤데라 선생!! 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전지적 작가가 직접 등장해 개입하기도 하면서 독자들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밖에서 등장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면, 농담에서는 주인공을 따라가며 그 캐릭터에 몰입해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구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특히 주된 주인공인 루드빅이 관심있던 여학생에게 던진 철없는 농담으로 당에서 추출당해, 모든걸 잃어버린후 찾아오는 분노, 증오, 상황에 대한 부정, 그리고 채념, 그후에 오는 깨달음을 그대로 따라가며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중간중간 던져지는 쿤데라 선생의 멋진 문장들에 감탄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다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129P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을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체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헤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232P
막 줄을 긋고 표시해 두었다가 한껏 폼을 잡고 읊어도 충분할 만큼 멋진 문장들
그리고
거대한 역사 속에 떨어진 개인의 삶, 전통과 현대의 갈등, 복수와 용서, 종교와 공산체제의 공존문제까지, 그 시대에 주어진 수많은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유머를 놓지지 않은 이 작품은 감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제치고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아직도 읽지 않은 그의 유명한 작품이 몇 더 있다는 사실은 또다른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