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처녀 자살 소동’ 의 원작소설이라서 영화를 찾아봤다. 이 네명의 소년들이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체다. 럭스를 구경하고 있는 장면인데.. 소년들은 성에 관심이 많다. 그들이 관심갖고 구하고자 했던 건 자매들이 아니다. 감춰지고 가둬지고 억압된 알 수 없는 존재인 그녀들은 그들에게 그런 존재로 드러난게 아닐까 싶다. 오직… ‘리즈번 자매들’에게 관심가져준 사람은 ‘리즈번 자매들’ 뿐이다.
끝내 어른들은 규정하려고 했다. 왜 죽었는지. 각종 것에 의미를 부여해 합리화하려고 했다. 서실리아가 죽었을 때, 그들은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그 전에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실리아가 처음 자살을 시도했을 때,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규정하고 해석하려고만 할게 아니고 행동했어야 했다는 거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
어떻게 해줄 수 있었겠는가. 리즈번자매들에게. 이 소년들이 설령 구해냈다고 한들. 밖에 나오면 다시 어른들의 세상인 것을…. 그래도 그녀들을 밖으로 꺼내주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안에서 보다 밖에서 무언가라도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리즈번자매들이 참 슬프다… 하지만 리즈번자매들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다. 그건 내가 리즈번 자매가 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동네에서 일어난 특별한 일이다. 한 집에서 다섯명이 자살했으니까. 한국이라면 집값 떨어진다며 난리가 났을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씁쓸함이 배로 밀려온다. 하여튼, 작가는 모든 것을 독자에게 맡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느끼고 생각하는건 우리의 몫이다.
처녀들이 자살했다…
책은 관찰자의 시점을 끝까지 유지한다. 그러니 끝내 그녀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는 없다. 나 역시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녀들을 이해할 뿐이다. 리즈번가의 다섯 딸들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십대에. 왜 그녀들이 어린나이에 자살을 하게 되었을까. 그녀들은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 그녀들이 자살을 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그녀들을 관찰한 소년들의 말을 통해 나 역시 추측해볼 뿐이다. 관찰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쓰게 될 이야기들은 단지 나의 의견일 뿐이다. 리즈번부인의 행동은 강한 억압이었고 리즈번씨는 방관에 가까웠다. 물론 리즈번씨 역시 아이들을 구속하지만 더 큰 구속인 리즈번 부인앞에 그저 모른척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두고 구속하는 리즈번부부를 모른척 하는 또다른 존재. 우리들이다. 우리는 늘 무관심했다. 옆에서 사건이 터지면 ‘내 일이 아니니까’ 그저 안타까워만 할 뿐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 언제 안타까워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소년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다. 이웃어른들이 모른척 했다면 아이들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행동해봤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도 어른들을 보고 배운 아이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바라봤다. 그 아이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