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이야기
알랭은 배꼽에 대해서 생각한다. 배꼽은 무의미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가슴, 엉덩이, 허벅지처럼 개별성을 가지지도 않고 사람마다 큰 차이도 없다. 그것에 대해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소설의 제목 ‘무의미의 축제’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그것이 무의미 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더이상 무의미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알랭이 배꼽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와의 묘한 추억 때문이다. 오랫만에 만난 어머니는 자신의 배꼽을 건드리고 볼에 입을 맞추고 떠난다. 어머니와 자신을 이어주던 유일한 증표,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최초 배꼽이 없는 자유영혼에서 시작된 배꼽은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것, 무의미한 것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배꼽은 그 증거다.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와 욕심은 사실 무의미한 시작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 전제가 없다면 나머지는 0을 분모로 하는 불능값을 갖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전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이는 결국 존재의 긍정과 연결된다.
스탈린 이야기
스탈린의 자고새 이야기다. 스탈린은 13킬로미터를 가서 24마리의 자고새 중 12마리를 쏘고 13킬로미터를 되돌아와 탄창을 챙긴후, 다시 13킬로미터를 가서 나머지 12마리를 잡았다고 이야기 한다. 농담인지도 몰라 웃지조차 않던 주변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서 그의 거짓말에 분개하며 성토한다. 농담은 가슴, 엉덩이처럼 개별성의 표현이지만, 스탈린의 체제는 이러한 개별성을 하나의 의지로 묶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이상 웃을 수 없게 되었고 모두 하나의 의지를 향한 과정으로만 생각한다. 각각의 공간에 놓여지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욕하고 비웃는 순간 각각의 개별성은 잠시나마 회생한다. 개별성을 부정하는 독재자가 원하는 개인이라는 것은 결국 그의 틀 안에서 자유로울 뿐이다.
스탈린은 칼리닌을 통해 손 안의 자유를 보여준다.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의장이지만 꼭두각시였던 그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은 인간적이었다. 칼리닌은 공식석상에서도 전립선 비대로 인한 요의로 싸워야만 했다. 그의 연설은 화장실을 가는 그를 위해 자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그의 인간적인 투쟁에 연민을 느끼며,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를 칼리닌그라드로 명명한다. 스탈린은 전체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연민을 마비시켰지만, 칼리닌에게 만큼은 값싼 감상주의를 허락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은 거대한 ‘의지로의 표상’ 안에 속할 뿐이었다.
통제 하에 있는 자유, 검열 되는 농담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 의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확보되면 어떤 형태로든 되살아 날 것이다.
라몽의 샤갈전, 칼리방의 연극
라몽은 샤갈전을 보러 갔다가 몇 번이고 늘어져 있는 줄에 질려 포기한다. 거기 속하는 대신 공원의 자유스러움을 보며 뭔가 편안함을 느낀다. 칼리방은 배우였다. 템페스트의 ‘캘리번’ 역 이후에 이미지가 고착되어 새로운 역을 맡지 못해서 지금은 샤를을 돕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일상과 멀어질수록 배우의 소명을 다한다고 믿기 때문에, 현실에선 파키스탄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현실과 숙명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한다. 규칙이나 의무, 현실의 아우라에서 멀어지려는 그들의 시도는 자체로 의미 있다. 의도적으로 무의미를 찾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용기있고, 지혜롭게 좋은 기분을 찾아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무의미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이들이 모여서 규정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이다. 그래서 라몽은 다르델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