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은 익히 알려진대로 구소련의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우화이다. 그러나 작가는 물론 소련의 상황을 빗대어 쓰긴 했지만 더 넓고 보편적인 의미로 봐주기를 원했다. 현재 전 세계의 상황은 동물농장 속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어떤 본질을 꿰뚫은 작품은 그 시대나 사회, 인간들이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 것을 담고 있어서 어느 시대에 가져다놔도 거울삼아 반추할 것이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경제는 나빠진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떠올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주의는 정말로 이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반란으로 착취와 홀대를 일삼는 인간을 쫓아낸 돼지그룹. 그들은 평등한 사회 건설을 위해 문맹 퇴치와 각자의 의견 존중, 주인 의식으로 농장에서 평등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런 세계는 사실 이상세계로 나도 꿈꾸고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다. 누구나 평등한 곳. 인간은 누구나 평등을 꿈꾼다. 내가 누구의 아래에서 지배당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평등을 꿈꾸지만 그런 마음의 한쪽에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기를 원한다. 조화로운 이상보다는 수직의 꼭대기를 꿈꾸는 것이다. 내 생각에 사람은 평등이나 지배자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원한다. 그래서 만민평등이라는 이상적인 세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지만 실제적으로 실행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동장을 새로 만든 돼지그룹은 전쟁을 통해서 권력투쟁을 시작한다. 그들이 몰아낸 인간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결국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동물농장은 실패한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던 구호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다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것을 목격했다. 선거철마다 돌아오는 정치인들의 공약이 아니던가.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처럼 내건 구호가 교묘히 바뀌어 무의미해질 때, 우리가 느끼는 배신감과 허탈함. 굳이 전체주의의 소련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정치권의 이런 일들이 반복되어 갈수록 국민의 배신감과 허탈감은 둔감해진다. 점점 국민의 정치참여라는 것은 무색해져간다.
이 작품이 원래는 우화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지 오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머러스한 풍자가 가득한 작품이기도 하다. 동물농장이라는 제목과 우화라는 부제 덕분에 어렸을 때는 진짜 어린이를 위한 동화인줄 알았다. 심지어 동물들이 주인공이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인물과 설정을 통해서 깊이 있는 메시지와 경각심을 전달하려고 했다. 덕분에 정치를 이루는 근간과 권력투쟁에서 보이는 빠지지 않는 요소들에 대해서 쉽게 알게 되었다. 정치에는 언제나 현재의 이념을 이끌어가는 주도자가 있고 그의 대척점에서 견제하는 이상주의자가 있으며, 주도자의 밑에서 이상주의자와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주도자를 수족처럼 따르는 신봉적 2인자가 있다. 그들의 파벌싸움에서 피를 보는 것은 국민이다. 이 책을 정치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제발 돼지그룹 내의 이익을 위한 것 말고 동물농장을 위해서 싸우지 않겠냐고. 인간은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 단지 언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뿐 만 아니라 머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농장을 읽으면 정말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동물농장을 단순히 소련의 상황과 일대일로 엮어서 읽는 것은 상당히 편협한 독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련 전체주의를 알고서 읽으면 풍자나 은유, 비유들에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게 소련체제를 연구하고 비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바람대로 그것에 머물지 말고 더 넓게 봐야한다. 확장해서 현재 우리의 상황으로 끌어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현재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 나날이 무너지고 있는 신뢰와 처지는 존스농장의 동물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과연 ‘존스’농장에서 ‘동물’농장이 될 수 있을까. 더 중요하게는 ‘메이너’농장으로 바뀌지 않고 그래도 ‘동물’농장으로 머물 수 있느냐는 문제일 것이다. 나아가 머무를 수 있으려면 이 작품을 더 여러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