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이전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1852년 24세의 나이에 <유년시절>로 데뷔한 톨스토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크림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감각적인 기질로 인해 육체적 쾌락을 쫓으며 젊은 시절을 보내던 톨스토이는 1862년 34세에,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화는 톨스토이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한데, 불화의 시작은 톨스토이가 방탕했던 시절의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싫어한 것은 거짓과 기만이었으며,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거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화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를 키티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재현되며,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만이 진실이며 정의라고 믿었던 톨스토이의 생각은 안나가 자신의 불륜을 감추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첫 구절 중 하나라고 알려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이 이야기가 가정의 모습을 소재로 할 것임을 암시한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평정을 유지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제7부 23장(3권)에서는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가정에 대해서 말한다.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많은 가정이 단지 완전한 불화도 화합도 없다는 이유로 부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곤 한다.’(제3권, 396쪽)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가정을 생기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하며, 침묵과 방관으로 유지하며 평화 혹은 행복을 가장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완벽하게 불화해 해체하는 것이 더 낫다. 바로 이 행동을 위해 안나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데, 가정교사와의 불륜이 발각됨으로써 위기에 빠진 오빠의 가정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는 경박하고 즉각적인 만족과 쾌락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방탕하고 무책임하며 대책없는 낙관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남자의 바람기는 건강의 증표라고 생각하는데,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내에게 발각되자, 잘못을 뉘우치거나 죄책감을 갖기 보다는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며, 이후에도 아내를 속이고 기만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한편 장녀로 태어나 사려 깊은 진지한 태도가 몸에 밴 스티바의 아내 돌리는 남편의 바람기와 가정생활에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다섯 아이들과 자립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며 결혼생활의 고통을 감내한다.
톨스토이가 말하듯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면 이들 부부에게는 바로 그것,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없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고 있다. 이것이 당시의 관습에 젖은 가장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 카레닌과 결혼하고 결혼생활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안나는 오빠 스티바와 돌리의 중재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브론스키를 만난다. 그러나 도덕관념이 확실했던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브론스키를 피해 도망치듯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옴으로써 브론스키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믿지만, 역으로 마중 나온 남편 카레닌의 귀 모양이 해괴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을 만족시키던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지. 그가 신앙심이 두텁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을 보지 못해. 그들은 그가 지난 8년 동안 내 삶을 얼마나 숨 막히게 했는지, 내 안에 살아 있던 모든 것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몰라. 그들은 몰라. 그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이 필요한 살아 있는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2권, 122쪽)
이후 브론스키의 구애를 받아들인 안나는 상류사회에 만연한 비밀 연애를 거부하며 브론스키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건다. 매순간의 삶에 충실한 그녀로서는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잘못보다 그를 숨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
실리적 성격의 카레닌은 정의로우나 감정이 부족하고, 경직되어 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한편으로 때때로 감정에 휘둘려 선행을 베풀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고위 관리인 자신을 찾아와 눈물 흘리는 청원자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그랬음으로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다가 죽을 지경이 된 안나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안나가 살아나고 브론스키와 떠나고 나자 아내와의 이혼을 거부한다. 실리적인 카네닌이 볼 때 이혼은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죄인이지 자신 언제까지고 피해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난 결코 불행해질 수 없어. 하지만 그녀도, 그도 행복해져서는 안 돼.(2권, 101쪽)
톨스토이는 카레닌의 이런 태도를 기만적이고 위선적이며, 독재적으로 묘사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한 카레닌의 고집불통인 태도가 나름 이해된다.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하나 카레닌 역시도 인간이며, 인간은 때때로 합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브론스키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쭉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을 카레닌의 가정 또한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애정 어린 화합이 결여된 채 사회관습에 충실한 가정 있었다.
10개월에 걸쳐 끈질기게 안나를 유혹한 브론스키는 무책임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쫓는다는 점에서는 스티바와 같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술수조차도 마다않는 스티바와 다르게 장교인 브론스키는 언제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 당당하며, 거리낌이 없는만큼 타협을 모른다. 안나를 얻기 위해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그는 때때로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존재마저도 무시하기 일쑤다. 그런 브론스키는 안나가 자신의 딸을 낳고 사경을 헤맬 때, 카레닌이 안나와 자신을 용서하자 수치심으로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과 남편을 떠난 안나가 자신과 결합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녀가 사교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브론스키는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며 다시 사교계를 들락거린다. 그는 그야말로 남의 아내를 꼬여낸 파렴치한 이였음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사회 생할에서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고, 그 스스로도 남자이기에 자신에게는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또한 안나는 그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뭐든지 내어 줄 수 있지만 나의 남자로서의 독립만은 줄 수 없어. (3권, 202쪽)
사교계의 일반적인 관행이 그렇듯 불륜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요령껏 숨기는 대신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안나는, 아들인 세료자 마저 버리고 오로지 사랑만을 택했지만 브론스키의 마음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
뿐만 아니라 카레닌과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한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는 자각에 이른다.
브론스키와 나 사이에 어떤 새로운 감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행복은 고사하고 그저 괴롭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런 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우리의 삶은 서로 어긋나게 돌아가고 있어.(3권, 447쪽)
브론스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안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으로 혼란스러워하다 달려드는 열차에 충동적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불륜을 세상으로부터 숨길 줄 몰랐던 그녀는 브론스키의 변심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브론스키가 고통받기를 바랐고, 한편으로는 남편과 자식, 그리고 사회적 규범을 배신한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불사를 듯 열정적으로 타올랐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는 애정 어린 화합 대신 자신을 채우기 위한 욕망만 그득했다. 그는 내게서 무엇을 찾았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허영심의 충족이었어.(3권, 444쪽) 그리고 그 결말은 파괴적이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과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안나의 이야기와 상응해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레빈은 도덕적인 이상과 절대적인 양심을 숭상하는 인물로 톨스토이의 분신과 같다. 농업과 노동의 신성함을 중요시하는 그는 브론스키가 안나를 만나기 전 추파를 던지던 키티와 결혼했다. 키티는 처음에는 브론스키에게 빠져 레빈의 구애를 물리치지만, 이후 열린 파티에서 브론스키의 마음이 안나에게로 향한 것을 눈치챈다. 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모스크바를 떠나 요양하던 중 자신이 진정 사랑한 것은 레빈 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레빈 역시 키티의 거절에 상처를 받고, 한때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빈이 처음부터 키티를 결혼 상대로 사랑했던 것은 아니며,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그려두고 거기에 맞는 여인을 찾았을 뿐이다. 그 첫 대상은 돌리였으나, 돌리는 이미 결혼한 여인이었으므로, 돌리의 동생인 키티에게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아무튼 레빈은 돌리의 중재로 실연한 키티를 다시 만나고, 둘의 사랑을 회복하고 결혼에 이른다.
특별한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키티는 사교계의 총아 브론스키의 사랑이 한순간에 변했음을 알고 병을 앓는다. 그러나 그녀는 브론스키를 사랑 했다기 보다는 어머니를 비롯한 사교계의 분위기에 이끌려 마땅히 브론스키와 결혼 할 것으로 기대했을 뿐이다. 이후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레빈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의심없이 그와 결혼했을 것이고, 보통의 상류사회의 부부들이 그렇듯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키티는 상대에 따라 삶의 가치나 중요도가 달라지는 시대가 원하는 가장 일반적인 여인이었다. (브론스키로부터 실연하고 외국의 온천에 요양중일 때 만난 바렌카를 닮고 싶어했던 그녀를 떠올려 보라) 그러나 거울처럼 상대를 비추며 순응할 수 있는 키티였기 때문에 정신적인 삶을 구현하며, 가정의 신성함과 자발적 자기 희생, 상호 존중의 의무를 중시하는 레빈과 애정 어린 화합의 모습을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는 남편의 정신적인 삶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처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소피야는 정말 악처였을까?)
부부간의 애정 어린 화합도 완벽한 불화도 없이 사회적 관습대로 유지되는 스티바와 돌리, 카레닌과 안나의 가정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한 브론스키와 안나가 꾸민 가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도 아니다. 육체적 욕망이 우선하는 ‘사랑’은 유효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톨스토이가 정답으로 제시한 관심과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레빈과 키티의 가정은 이상적이고, 완벽해 보이지만 그것 역시 유일한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도만으로는 묶어둘 수는 없는 욕망하는 감정적 동물이기도 하니까.
쉽게 톨스토이의 분신은 레빈으로 이해되지만, 정신적인 레빈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안나는 둘 다 톨스토이의 현현이다. 두사람 모두 거짓과 기만을 싫어한 같은 부류로 톨스토이는 안나를 통해 욕망을 고백하고, 동물적인 본성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레빈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바란 구원은 내세가 아니라, 사는 동안 이룰 수 있는‘선’에 있었다.
한편, 아내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결혼 후 방탕한 생활을 벗어나 안정을 찾음으로써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쓰게 되었고, 이때 아내 소피야는 톨스토이가 휘갈겨 써놓은 <전쟁과 평화>를 여러번 정서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화는 톨스토이의 말년까지도 계속되었고, 1910년 여든이 넘은 나이에 가출 한 그는 어느 작은 기차역에서 객사했다. 톨스토이 역시 가정에서 별다른 행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