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고파서 너무나 우울했던 요 몇일… 나와 동갑내기 영국작가 존 맥그리거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So many ways to begin…` 이라고 속삭이면서…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박물관 큐레이터 데이비드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자신의 생모를 찾고자 과거를 더듬는 가운데…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내와 힘든 시간을 뒤로 하고 딸 케이트를 키우며 자신만의 가정을 만들어간다… 가족이 되는 방법에 대한 고민과 갈등, 철학이 담긴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래된 물건들에 유달리 관심과 애정이 깊은 주인공 데이비드…
내러티브의 핵심은 그가 수집한 일상의 잔재들이다. 자그마한 물건들…
예를 들어 손상된 흑백사진, 손으로 쓴 살 것 목록, 세금 고지서, 포도주 코르크 마개, 손으로 그린 가계도, 숙박 영수증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시기. 매 장 마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소재가 된다. 비교적 서사적인 흐름속에서도 불쑥 과거와 현재, 60여 년 내의 여러 시간대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흘러와 지금 여기에 있는 `자그마한 조각들` 때문이다.
1940년대와 2000년대의 이야기가 함께 흘러갈 수 있는 것은 이런 일상의 잔재들이 현실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 사실상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은 잔재물들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소중히 여기는 시선… 나에게 이 소설의 감동은 거기에 있었다.
정말이지 큰 영감을 주었다. 책고팠던 나는 이 책이 준 영감으로 배가 부르다. 책을 읽은 뒤의 영감들이 일상에 발딛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일이 다반사지만…
그래서 또 금방 허기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영감을 곱씹고 곱씹으며 소설 속 데이비드로 빙의되어 내 주변의 잔재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