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다는 것…

대학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던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책과 영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마도 20대 초반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은 흔들리는 청춘, 그 방황의 시기..
그 시절 내 스스로 인생에 붙이고 싶은 타이틀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두 제목은 한 뿌리인 듯 묘하게 닮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자체가 불안한 영혼이요…
불안에 잠식당한 영혼, 그러한 영혼을 지닌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 책은 1960년대 냉전 시대를 관통해 온 체코의 상처투성이 역사 속에서
불안한 영혼으로 한 시대를 마주한 네 남녀가
그 무겁던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되어
역사의 바람에 실려 흘러간 이야기이다.

무거움과 가벼움. 그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
무거운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은 지극히 가벼운 것이었고,
무겁게 자리 잡은 절대적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는 그저 가벼운 유희에 불과하다는 주인공 토마시.
7부작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마치 삶의 무게가 들썩거리는 시소를 타는 듯한 느낌으로 가득찬….
1968년 프라하의 봄과 2015년 대한민국의 겨울.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는
그들의 자화상도 있고 또 나, 우리의 자화상도 있었다.
20여 년 전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텍스트 사이에서 네 남녀가 겪는 현실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저 호색한 토마시의 정사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체코 지성인들의 방황이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고…
그 불편함이 일종의 매력으로 와 닿았었다.

책의 텍스트는 그대로인데… 그저 시간이 흘렀다..
내 눈앞에는 그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그들이 겪었던 현실의 무게감이 가슴으로 느껴지고…
1968년 프라하의 봄, 환한 햇살 속에서도 왠지 스산한 기운이 짙게 내려앉은 그  공기가 내 폐를 들락거리는 것 같다.
그들이 말하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내 손으로 만져보고.. 또 가슴 속 저울 위에 올려보기도 하고 또 그 아래 들어가 짓눌려도  보고…
이야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세월이 주는 고마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옳고 그름은 아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삶의 무거움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 수도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 그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
그러나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고민은
결국 가치에 대한 고민이고 내가 살고자 하는 오늘과 내일에 대한 결정이고
내가 만나고 싶고, 내 아이가 살았으면 하는 미래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그것이 아니라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라도
무거움과 가벼움, 그 갈등의 경계에 나를 세워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