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출간일 2012년 9월 10일

작가 첫 작품 <경마장 가는 길>이 생각난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로도 보았지만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잘 읽혔고 그 이전까지 접해보지 못한 문장과 구성 때문에 신선했다. 아마 잘 읽힌 것 때문에 그의 다른 소설도 읽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다 한동안 한국소설을 멀리하던 그때 장정일의 <독서일기> 속에서 <진술>에 대한 극찬을 보았다. 그 당시 <독서일기> 속 소설들을 사고 읽고 하던 시기(대부분은 읽지도 사지도 못했지만)였는데 많지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을 읽고 이전까지 몰랐던 하일지를 발견했다. 그 후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경마장 가는 길>을 제치고 최고의 소설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기억을 안고 읽었다. 이전처럼 작가는 친절하지 않다. 처음 손님이 하원에 나타났을 때를 묘사한다. 간결하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허도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허도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 죽는 날만 기다리면서 고욤나무 밑 지렁이를 캐서 먹는 인물이다. 그가 지렁이를 먹는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가족이 없느냐 하면 아니다. 허표와 허순이라는 형과 누나가 있다. 단지 그들이 그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손님과 허도의 만남은 소설의 시작이란 점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손님 슈가 하원에 오게 된 것은 표면적으로 누나 허순의 무용반 팬이기 때문이다. 허순은 학교에서 춤을 가르치는데 서울 무용대회에서 손님을 만났다. 그 당시 손님은 허순과 무용반에게 크게 한 턱 쏘았는데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가 허도에게 허순의 집을 묻고, 허도는 그를 누나의 집으로 안내한다. 이때부터 허도는 손님과 동행하게 되고 손님을 둘러싼 가족과 학생들의 한판 낯간지럽고 부끄럽고 추악한 현장을 보게 된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손님이 왜 참고 웃으면서 넘어가는지 의문을 품는다. 물론 이것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될 때 이 모든 장면들을 이해하게 된다.

 

허약한 허도가 관찰자로 자신의 감정을 토해낸다면 허순과 다른 사람들은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허순의 동거남 석태는 욕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손님을 벗겨 먹을까 생각하고 허순은 어느 순간 노골적으로 그를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손님과 학생들을 데리고 간 개고기집에서 보여준 장면은 시작일 뿐이고 손님이 머물 호텔 앞 호수로 가기 위해 마트를 들렀을 때 보여준 행동은 ‘아! 사람이 이렇게까지 염치없고 비루해질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더 심해진 원인 중 하나가 슈가 한국어를 모른다는 것이고 시작은 개고기집에서 돈을 계산한 후부터다.

 

허순과 석태의 끝없는 작은 욕심들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적반하장으로까지 번진다. 그 와중에 손님이 허도를 계속 데리고 가고 싶어한다. 덕분에 허도는 관찰자로 이 염치없는 장면들을 보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만의 환상을 투여한다. 아마 허도를 제외하면 이 소설 속 그 누구도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들의 행동과 예측만 있을 뿐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다. 그런데 이 시간 속에 담고 있는 인간의 욕망은 다양하다. 거대한 욕망이 아니라 소시민의 자그만 욕심이지만 가슴 속에서 읽는 내내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왜? 그는 이것을 웃으면서 참고 넘어갈까 의문을 품는다.

 

여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지나가듯이 욕망 한 자락을 내비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 소설 속에서 그녀들은 사실 들러리이기 때문이다. 허순의 염치없는 행동을 보면서 인상을 쓰지만 그들도 자신들이 누릴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단지 순간을 즐길 뿐이다. 재미난 것은 유일하게 이 상황에 위화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물이 허도란 것이다. 그리고 허도에게만 손님이 한국말을 하는데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그것을 살짝 잊었다. 자연스런 장면의 이동과 상황 전개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