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무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를 읽었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인지 안개속을 걷는 듯이 막연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지,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도무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 화자인 “나”의 성격도 목적도 모호하고 흐리다.
그래서 그런지 고작 17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 이 소설을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붙잡고 있었다. 왜 이 소설이 이렇게 난해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끝까지 읽어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고 궁금했다. 그러나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는 참으로 험난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공상과 회상에 시달렸다. 어느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책을 덮고 아예 눈을 감거나 잠을 자거나 딴짓을 했다. 그래도 끝까지 읽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읽는데만 집중했다.
2.
무언가 설명 할 수 없는 “결여”를 느끼며 읽어가던 이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난감해졌다. 몇장 남지 않았지만 그저 이 이야기의 서술 스타일에 조금 익숙해졌을 뿐, 여전히 난해한 이 이야기가 이렇게 그저 끝나버릴 것이란 사실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댈 곳은 오직 하나, 작가 후기나 작품해설 정도일 것이다.
3.
저자 박솔뫼 스타일에 맞춘 듯한 금정연 서평가의 작품해설 속에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듣는 박솔뫼는 기타위주의 포크 음악 같지는 않고, 두 대의 턴테이블과 한 개의 마이크로 부르는 노래도 아니다. (중략) 차라리 리듬, 덜컥 소리를 내면서 탈구하고 덜컥 덜컥 그리고 두 줄을 건너가서 다시 덜컥 하는, 얼음으로 말하자면 앞의 얼음이 부서지고, 그 앞이 새롭게 결빙되어 가는 리듬으로 가득한 노래에 가깝다. 박솔뫼의 소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을 맛볼 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것이다.”p.178
그렇다. 나에게는 이 소설의 맛을 느낄만 한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감수성이 충만한 그들이 보기에는 그런 것이다.
4.
앞으로 감수성이 필요한 소설에는 표지에 “감수성 00% 이상 함유, 00% 이상 감수성 탑재한 분들만 구입할 것”이라고 써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