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데이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A는 매우 솔직하므로, 나도 이 리뷰에선 솔직해지기로 하자. 책을 받기 전까진 이 모든 “사건”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책을 받으면 – 읽고 – 짧게 감상평을 남기면 끝. 쉽게 페이지가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리뷰 쓰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머리 속에 여러 감상들이 복작복작하다. 머리 속이 복잡복잡하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써야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다, 아니 되려 너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마구 흔들린다. 그 혼란에 대해 글을 쓴다. 그리고 나는 나로 성장한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로 책을 사는 나는 광고 문구 몇 줄을 읽고 책을 고르는데,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가미된, boy meets girl의 뻔한 내러티브. 한 소년이 자신과 다른 소녀를 만나 변화를 겪는, 그런 통과의례 소설. 다만 이번의 경우는 소녀가 드림 걸, 이상향의 소녀이거나(물론 소녀는 늘 이상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다) 아니면 팜므파탈의 미니언급이 아니라 소년 쪽이 수상했다. 변해야 하는 소년이 너무도 이상했다. 이 점에 흥미를 가지고 민음사 이벤트에 응모하고 #민음사가_또_해냈다.
에브리데이, 이 소설은 16년을 산 “무언가”들이 자신 밖의 “무언가”들과 관계를 맺고(아님 맺지 못 하고)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한다. 그 무언가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A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비록 소설에서 다루는 하루하루는 A가 동력이 되는 날이지만, 그 하루가 온전히 A만의 것이 아니란 것. A는 자신이 안에 들어가는 이 “무언가”들의 삶(의 방식들과 태도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비교가 삶의 불행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현실과 다르게 말이지, 이 비교는 A가 “무언가”들인 타인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의 동력이 된다.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외부와 나를 비교해서 나 자신을 깎아먹는, 그런 비교가 아닌.
A가 한 소녀, 리애넌에게 갖는 애정이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A가 리애넌과 겪는 변화가 중반엔 부각되진 않더라. 하지만 전부를 읽고 나선, A의 존재가 점점 두터워지는 건 전부 이 연심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애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그런 나아짐이 아니라, 그/그녀가 한 선택, 행동, 그리고 감각 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이어가며 좀 더 성장하는 A.
만약 이 책을 단순한 청소년들의 연애담과 묶으려고 한다면:
1 몸의 요구에 지지 않는 A.
2 어떤 성적 취향을 지닌 독자라도 이 작품 세계에선 소외되지 않는다.
3 Alien의 A.
이렇게 세 가지의 이유로 난 이질감을 느낀다.
몸이 자꾸 바뀌지만 화자는 1인칭. 이 소설은 몸과 정신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이 전제 때문이라도 몸의 욕구에 끌려다니는 A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신을 몸의 위에 놓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A의 하루하루를 통해 나는 몸의 욕구는 정신의 문제와도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마약은 잠시나마 온전한 정신을 상실하기 위한 것이고 자살은 더이상 버티지 못 하는 정신을 영원히 상실하려는 시도다. A는 정신을 잃자고 몸을 저버리는 행동들에 참여하지 않는다. 내겐 A가 영혼이자 정신이기에 자신을 위협하는 행동을 그만두게 만드려는 시도로 보이진 않았다.결국 원인에 몸을 놓든 정신을 놓든, 파멸을 결과로 놓지 않겠다는 것. 청소년에 대한 연애소설에서 절제 모르는 삶이라든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이라 연애를 미화하는 위험도 없다. 그러면 재미없겠지? crazy in love에서 crazy를 뺀, madly in love에서 mad를 뺀, in love. 우리가 연인에게 바라는 사랑을 유지하는 A를 본다면 그게 재미 없을 수가 있나 싶다.
자신이 소년인지 소녀인지 확신하지 못 하는 A. A가 들어가서 하루의 삶을 사는 이들의 성적 취향도 매우 다양하다. 동성애 커플, 마초성을 강조하는 남자,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자, 그리고 타고난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 보통 연애소설이라 함은 이성애가 중심이 된다. 물론 동성애를 다루는 작품도 많고 점차 늘어나지만, 서점에 ‘퀴어’라는 코너를 따로 마련하듯이 아직도 이성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이다. 결국 그런 소설을 읽는, 이성애자가 아닌 성 취향의 독자는 소외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또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나/너/그/그녀/우리는 그 세계에서도 소외되는 것. 소설 초반에 A가 리애넌의 남자친구인, 저스틴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소년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질 수도 있는 위험이 살짝 있긴 하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런 확신은 점점 옅어지지만 리애넌이 이성애자니깐 결말에서 다시 굳어지는 소년 이미지는 아쉽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데 내게 자유가 있다면, 나는 A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쓰는 대문자 A를 에일리언Alien의 A로 보고 싶다. 비록 에일리언이 사회 존속을 위해 배척해야 할 적이자, 이질성이라고 쉽게 여겨지지만, A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질성은 내뱉어야 할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라는 한계를 넘어갈 수 있다는 그런 긍정적인 이질성이 있을 수 있단 걸 알았다.
“물론 이 이야기를 읽는 ‘나’는 육체없이 정신만 떠도는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나 역시도 수많은 이질성을 지닌 존재인 에일리언이잖아. A가 리애넌 옆에 머물고 싶어 이질성을 버리기 위해 탈(가면)을 쓸 수도 있겠지만, 굳이 머물 필요가 없잖아? 에일리언의 누군가를 죽이면 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규칙(혹은 인간 사회에서의 규칙 어김)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아.”
에일리언이 이질성을 없애기 위해 이질성을 죽인다면 자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니깐 에브리데이는 자살(그게 물리적인 자살이든, 사회적 자살이든, 내 이질성을 지워버리는 자살이든)하지 않고 살아가는 매일의 이야기가 아닐까.
재밌게 읽었다. 손에서 놓지 않고 거의 끝까지 읽었다. 설마 이런 전개는 아니겠지! 싫은 예감이 드는 전개도 많았다. 싫은 예감이 곧 작품에 대한 평가절하는 아니다. 예감이라는 건 마땅히 올만한 이야기라는 것이고 싫다는 건 주인공의 삶이 평탄치는 않다는, 흥미롭다는 뜻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