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사별한 지 3년, 이별이 익숙치 않은 스물아홉의 정아는 그를 떠나보낼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또다른 이별을 준비해야했다. 말기암환자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와의 이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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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는 몹시도 신파적이나 문체 덕분인지 슬픔을 비롯한 정아의 감정이 몹시도 담백하게 느껴졌다. 엄마를 간병하는 진아와 정아의 모습이 매우 현실감 있다. 시한부환자의 가족이라고 해서 하루종일 울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서운해하기도 하고, 예민해져 싸우기도 하고, 넌 왜 병원을 안 알아보냐, 넌 왜 연락도 안 해보냐, 그런 너는 %@^#*&*^%로 이어지는 그런 것들. 게다가 무뚝뚝한 부산사투리도 일품이다. 세 모녀의 대화를 보면서 몇 번을 피식거렸다. 자매라고 해서, 모녀라고 해서 다 다정다감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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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개로 소설에서 등장하는 단 한 명의 남캐인 고호민도 너무 좋았다. 감정과잉 없는 담백한 다정. 내가 다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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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평론가가 아마추어의 향내를 운운했기에 기대 없이 봤는데 (그러는 논란에 휩싸였던 모 작가는 프루스트 아니 에르노 롤랑 바르트에 빗대었더랬지 뭐 이건 차치하고) 기대보다 좋았던 소설. 사실 아마추어의 향내라는게 일반 대중인 전 뭔지 1도 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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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80
자매야 그렇다 치고 엄마는 어떻게 눈물도 없이 선고문을 받아들였을까? 딸들 앞이라서 신념 같은 덤덤함을 유지해야 했던 걸까? 정아는 그 뒤에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이날 엄마가 보여 준 단정함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건강하게 잘 살다가 검사를 받고, 그 검사가 이상하대서 다시 검사를 받았는데, 현대 의술로는 못 고친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느닷없이 죽을 날을 받게 된 것인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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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3
“뭐 마실래?”
고호민의 목소리다. 카페에 들어온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아직 주문도 안 하고 있었다. 고호민이 밀어 주는 메뉴판을 정아는 그제야 들여다본다. Americano, Flat White, Latte, TheClassic. 죄다 영어다. 멋을 잔뜩 부려 쓴 필기체다. 집중해서 들여다보는데도 잘 모르겠는 메뉴투성이다. 그리고 그게 희한하게도 억울하고 서럽다. 시야가 흐려지며 눈물이 줄줄 흐른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태풍 얘기에 진을 빼 버려서 버틸 힘이 없다. 정아는 꼼짝없이 당하는 심정으로 눈물을 쏟고만 있다. 고호민이 어디선가 구해 온 두루마리 휴지를 건넨다. 휴지를 받아 들고 정아는 괜히 변명한다.
“아니, 영어 모르는 사람은 커피도 마시지 말라는 소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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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3
산티아고라는 곳에서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작가들과 함께 정아도 흠뻑 빠져 듣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리고, 언니 이름이 뜬다. 새로운 세계, 산티아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병실에 있는 언니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정아는 핸드폰 버튼을 꾸욱 눌러 무음으로 처리한다. 언니와 약속한 시각을 훌쩍 넘어, 벌써 9시지만 정아는 일어서고 싶지 않다. 여기에 조금 더 있고 싶다. 죽은 남자 친구도없고 아픈 엄마도 없어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는 곳. 괜한 배려로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곳, 이곳에서,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 없이 현재를 조금 더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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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8
엄마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덤덤했다. 끝내 눈물을 보이지않았는데 정아는 그게 그렇게나 답답했다. 쏟아 내지 못한 눈물이 암 덩어리가 되어 엄마를 공격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날 새벽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눈이 퉁퉁 부어 모든 게 뿌였다. 느낌뿐인 묘한 꿈이었다. 정아가 누운 간이침대의 담요가 축축했다. 뭔가 싶어 벽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벽도 축축했다. 내디딘 바닥도, 소파도, 테이블도, 링거대도, 물통도, 티브이도, 엄마 침대도, 모든 것이. 병실의 사물들이 엄마를 대신해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아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꿈속에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