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개로 거리에서 처음 만나 살게 된 반려견 타이오의 사후 그에 대한 단상을 읊은 짧은 에세이이다. 정말 짧은 글이라 금방 읽히지만 사랑하는 개를 잃고 슬퍼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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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17
누군가 죽고 나면 우리는 질문을 품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녕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의사 여러 명이 병자 한 명을 둘러싸고 있는 고야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사람은 어떤 병으로 죽게 될까?”
그는 죽는다. 확실하다. 이제 죽음에 명칭을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의사들의 관심사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의사들이 ‘살 수 없다.’ 라고 선고하고, 그와 같은 ‘살 수 없음’의 진단은 낫게 할 방법을 찾는 모든 시도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목숨을 앗아 가는 자객의 정체를 찾는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객은 대자연이다. 우리에게 첫 번째 날을 선물한 자연이 마지막 날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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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43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에게 돌연한 죽음을 안긴다면, 그것은 상대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인가,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인가? 숨이 끊어지는 모습은 지켜보기 힘들다. 하지만 당신은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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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50
나는 누군가에게 애착을 품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애착을 갖는 것은 좋다. 내 동류의 인간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망을 들어줄 상대가 없을 때는 개를 구한다. 개의 눈에는 그 누구도 절름발이가 아니고 추한 인간도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니고 몸이 기형이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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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82
나는 병자를 그 가까운 사람들이, 노인을 자식들이, 때로 환자를 간병인들이 세심하게 보살피는 모습이 좋다. 베개를 새로 바꾸어 주는 일은 사실 하찮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달리 해 줄 게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과정을 대자연에 (신에게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넘겨준 채 온 힘을 다해 바로 그 자연에 맞서지만, 그럴 때 우리의 온 힘은 결국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거의 아무것도 아님’이 나를 감동시킨다. 그것은 인간적임에 남겨진 여백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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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86
우리는 스스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살아남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과 가축들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고, 부모를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 자신을 잃고서도 살아남는다. 사는 동안 육신의 부분들이 우리를 버려두고 가 버리기도 하지 않는가. 나중에는 우리의 계획과 추억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살아간다’ 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