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정세랑은
재: 미쳤다
이 소설 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아 물론 맥켄지와 지영씨는 빼고요ㅠㅠ
“아는형”이 별명인 안은영은 보건교사다. 평범한 보건교사는 아니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이는. 피를 질질 흘리며 사람을 위협하는, 흔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몰골이 아닌 젤리 형태의 이상한 것들을 찾아다니며,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그것들이 산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게 물리치는 일종의 퇴마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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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14
장난감 칼과 총에 은영 본인의 기운을 입히면 젤리 덩어리와 싸울 수 있었다. 비비탄 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사용 가능하다. 이집트산 앙크 십자가와 터키의 이블 아이, 바티칸의 묵주와 부석사의 염주, 교토 신사의 건강 부적을 더하면 스물여덟 발, 19분까지 늘일 수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삶은 이토록 토테미즘적이다.
젤리와 싸워 쇠한 기력은 돌아가신 창립자의 아들 홍인표의 손을 잡고 충전을 하는데 홍인표는 소싯적 오토바이 사고로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장애인이다. 물론 안은영도 어릴때부터 이상한 것들을 봐 왔기에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아왔고. 남주든 여주든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사람에서 조금 벗어난 소수 약자다. 지금은 여성작가들이 빛을 보면서 소수성을 지닌 주인공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래도 절름발이 남자주인공이 흔한 설정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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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귀엽고 즐겁다. 민폐캐릭도 없고 악인도 용인할 만하다. 눈살을 크게 찌푸리거나 잔인한 묘사로 책을 덮어야 할 일도 없다. 철부지 미성년자에 대한 너그러움이 많이 사라진 요즘, 정세랑의 소설에 나온 고등학생들은 일면 불량하고 속 터지게 하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순수하다. 현실 속의 고등학생도 크게 다르진 않을텐데, 소수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까지 놓치지 않는다. 정세랑 작가는 2권을 반드시 내놓으세요ㅠㅠ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ㅠㅠ
P.185
학교 근처에서 큰불이 난 다음이었다. 그 건물은 성매매 여성들의 숙소였는데 포주가 현관도 창문도 바깥에서 잠가 뒀기 때문에 열여섯 명이 죽었다.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있었다.
P.189
-크레인 사고였어. 넘어오는데 그대로 깔려 버렸어, 멍청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언제나 피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든. 피하기는 무슨.
말끄름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강선이 말해 주었다. 은영은 문득 크레인 사고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되짚어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크고 무거운 기계가 중심을 잃고 부러지고 휘어지고 떨어뜨리고 덮치는 일이 흔하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P.210
은영은 이민 간 친척들을 떠올리며 속이 상했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은영이 바늘 끝처럼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미워하는 마음에는 늘 죄책감과 자기 검열이 따르지만 매켄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맥켄지를 미워하는 데에는 명쾌하고 시원한 부분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