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의 단편을 묶어낸 최진영 작가의 소설집이다. 따뜻하고 외롭고 쓸쓸한 글을 쓰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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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지오에 사는 이나가 엄마의 동생 출산으로 혼자 사는 프리랜서인 고모의 집에 맡겨져 생활하게 된다. 고모의 집에는 없는게 많다. 고모의 집에서는 누워도 앉아도 신발이 보인다. 신발 냄새가 난다고, 고모는 왜 아파트에 살지 않느냐고, 우리 엄마아빠의 월급은 한 달에 천 만원이 넘는다고, 고모는 가난하냐고 묻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잔인성에 씁쓸하기도 한대 쥐어박고 싶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일뿐. 고모가 이나에게 했던,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이 아니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인상깊다.
P. 042 ?돌담
그때 내가 무엇을 피하려고 했는지 이제는 안다. 내가 어떨 때 거짓말하는 인간인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에서 도망치는 인간인지 생각하기 싫었다. 그런 나를 내게서 빼고 싶었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더 잊으려고 했다. 결국 나는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사는 어른이 되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 버린 형편없는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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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3 ?첫사랑
삶은 활짝 펼쳐진 종이가 아니라 불규칙하게 구겨진 종이다. 펼쳐진 채로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것들이 구겨지면 가까워지고 맞닿고 멀어지기도 한다. 나는 여기 가만히 있는데, 이우미는 거기 가만히 있는데, 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의 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우미가 왜 나를 좋아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왜 이우미를 좋아하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이우현이 왜 나를 좋아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 없다. 나는 왜 이우현을 좋아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우현이 내게 “어째서 내가 아니라 이우미야?”라고 묻는다면 같은 질문을 이우현에게도 던질 수 있다. “어째서 나수정이 아니라 나야?” 이우현에게는 대답이 있을까?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 고집이나 부리지 않을까?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는 태양과의 적당한 거리 때문이고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다. 태양과 거리가 달라진다면 지구의 생명도 박살날 것이다. 이우미와 나의 거리가 달라진다면 나의 세계도 한 번쯤 박살 나겠지. 그래도 이우미가 거기 있었기에 난 생명을 알았다. 생명이란 게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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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4 ?가족
친구에게 물어봤었다. 고아라는 말, 이상한가? 내가 고아라고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져. 그때 친구가 말했었다.
가족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가.
이성애자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낯설어서 그런 건가.
어떤 사람들은 이유를 듣고 싶어 하잖아. 고아인 이유, 동성애자인 이유. 사실 이유가 어디 있냐.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도 있는 거지. 근데 반드시 이유나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걸 들어야만 납득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주은은 국그릇을 닦으며 콩나물국을 생각했다. 남자가 타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국을 고집한 이유를. 어쩌면 그건 지금까지 국을 주장하면 결국 국이 나왔기 때문 아닐까? 여자 말대로 남자는 국에 숟가락만 담가뒀다. 남자는 입이 마르면 소주를 마셨다. 콩나물국은 그대로 식어 쓰레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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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4 ?의자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달렸다.
내가 먼저 소진을 알아봤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계절이 생겼고,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특별해졌으며, 머지않아 의자도 하나 생길 터였다. 내가 먼저 소진을 부르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열다섯살 그 새벽부터 소진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 내 방향을 틀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돌아서게 했고,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그리로 발을 떼게 만들었다. 내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애할 때 많은 사랑의 말은 나를 지치게 했다. 사랑은 그것 그대로 있을 텐데 때로는 내가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