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이름은 언젠가 한 존재가 타인을 위해 진심을 담아 건넨 최초의 말이라는 것을.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인간이 타인을 껴안는 첫 번째 방법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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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 혹은 박에스더, 그리고 나나. 세 이름, 세 인생을 산 그녀는 프랑스로 입양된 입양아다.

나는 암흑에서 왔다.로 시작하는 그녀의 내밀한 독백은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짐작케 한다. 나를 버린 생모에 대한 원망, 철로에 버려진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자 위탁자였으나 결국엔 고아원으로 보내버린 기관사에 대한 양가감정, 자신을 입양한 프랑스 부모에 대한 고마움 그러나 완벽하게 소속되지 못했던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된 입양아라먼 누구나 갖게될 소속감 문제,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 뭐 그런 것. 물론 네가 뭘 알겠냐 하겠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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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입양된 나나의 이야기를 독립영화로 찍고 싶다는 서영의 이메일로 인해 돌연 한국행을 선택하는 그녀에게는 우주라는 작은 비밀이 있다. 그녀의 뱃속에서는 막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태원에서, 미군의 아이를 가진 복순과 그녀의 혼혈아인 딸 복희를 잠시 맡아 키우던 추연희를 만나 치유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나나가 우주와 삶에 대한 애착을 키워가는 것을 보는 것은 나에게도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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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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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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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OOO입니다. 좋은 뜻을 가졌고, 그렇게 자라라는 내 부모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다지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자라지는 않았지만(ㅋㅋㅋ).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P.007

나는 암흑에서 왔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영원이란 무형의 테두리에 갇힌 암흑이 나의 근원인 셈이다. 방향성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나는 홀로 그곳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때 내 형상은 둥글고 단단한 씨앗 같았을까, 아니면 가늘게 이어지는 희끄무레한 연기 같았을까. 어쩌면 작은 반동에도 속절없이 무너지거나 흩어지는 가변의 물질이었는지도 모르고 아예 형상조차 없는 한 줌의 에너지였는지도 모른다.

암흑에서 형성되어 암흑을 찢고 태어났으므로 내게는 부모가 없고, 내가 형성될 때의 태몽이랄지 세상으로 나올 때의 울음소리를 기억해 두어 이야기해 준 부모의 부모도 없으며, 기고 앉고 서고 말문이 트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준 친척이나 이웃의 어른도 없다. 부모의 신상 정보가 기록된 호적등본, 나의 출생 일시를 공식화한 출생 신고서, 내가 태어난 병원의 진료 차트 역시 나는 갖고 있지 않다. 대신 내 입양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급조한 단독 호적과 대리인의 입양 동의서, 국제 예방접종 증명서와 여행 허가서, 양부모의 통역과 편의를 돕는 코디네이터 비용 청구서, 그리고 입양 알선 수수료-신체에 장애가 있는 경우엔 할인이 적용된다고 알려졌으니 비장애 아동이었던 내게 부여된 수수료는 정가였을 것이다. -를 처리한 영수증 같은 것은 한국의 입양 기관이나 입양을 관리하는 정부 산하기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탯줄은 있었을까. 가끔 그런 의문이 들 때면 반사적으로 두손을 배에 얹고 가만히 배꼽 근처를 더듬어 보곤 한다. 그러나 내 배꼽은 생모의 흔적일 뿐, 그녀의 손끝 하나 재현할 수 없다. 무력한 증거, 고유성 없는 기호, 닫힌 통로….. 나는 그녀의 생김새와 인상, 체취와 촉감, 말투와 목소리의 느낌, 웃고 울 때의 표정, 잠버릇과 징크스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런 종류의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게 그녀는, 또 하나의 암흑이다.

 

 

P.029

“함께 밥을 먹고 쇼핑을 하다가도 어느새 내 영혼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다시 만난 가족’ 이라는 콘셉트로 연기를 하고 있는 그들과 그들 속에 있는 나를 냉담하게 지켜보는 거예요. 늘 그런 식이죠. 내가 그리던 가족이 아니에요. 실은 그들이 비참할 정도로 가난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그들에게는 집과 자동차가 있었어요. 언니들은 둘 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엄마는 늙은 개까지 키우고 있더군요. 뻔뻔해. 낳아 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는데 낳아 놓고는 내 동의나 허락도 없이 먼 나라로 보내 버렸죠. 그랬으면서 개를 키우고 있다니…… 그들은 모를 거예요,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들을 칼로 찌르고 그 시신을 짓밟고 유기하는 상상을 한다는 걸 말이에요.”

 

 

P.107

서영의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대기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볼륨 장치가 갑자기 작동을 시작한 듯 쏴아 하는 소리가 증폭되어 들렸다. 나는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하얀 배꽃이 지붕 위로 떨어지는 역원의 마구간을 상상했다. 빗물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합정의 큰 우물과 아현의 젖어 가는 애기 무덤들도 상상했다. 그런 상상을 이어 가자 서울이 보이는 것 위로 보이지 않는 것이 겹쳐 있는 입체적인 도시처럼 느껴졌다. 보는 각도에 따라 풍경의 선들과 빛의 색깔이 달라지던, 어린 시절 앙리가 선물해준 워터볼 안의 도시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P.175

백복순과 백복희를 만나기 전까지, 연희는 대학 시절의 나와 비슷한 질감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사는 것일 뿐, 근원적인 마음의 끝은 죽음에 닿아 있던 그 암전의 시간 말이다. 그랬으므로, 연희는 아픈 백복순과 백복순이 낳은 백복희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모녀는 연희에게 두 번이나 지켜 주지 못한 생명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다시는, 어떤 생명이든, 차갑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을 테니까. 생명은 연희에게 위로이자 구원이었을 테니까.

이제 내게 추연희라는 이름은 복희 식당에서 노동하던 노년의 여성만을 지칭하지 않았다. 상실하면서도 꿈을 꾸던, 상처받았으면서도 그 상처가 다른 이의 삶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애를 썼던, 너무도 구체적인 한 인간이었다.

추연희, 1948년생, 백복희의 두 번째 엄마……

 

 

P.192

서영의 말대로 철로에 버려졌다는 단정은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생이라는 표면에 군데군데 나 있는 깊고 어두운 굴 같은 것이어서 발을 헛디뎌 그곳에 빠질 수는 있어도 그 누구도, 영원히, 그 굴 안에서만 머물지 못한다. 고립이 필연적인 자기 연민에 침잠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으나 그 마음의 상태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단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