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득하고 꾸덕한 사랑의 끝이란

출간일 2023년 11월 30일

참 독특한 소설이다. 인물 각각의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서 공감이 되는 바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소설이다. 밝고 희망찬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진득하고 꾸덕한 사랑의 탈을 썼으면서도, 결국에는 모두 회피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버린, 약간은 허무한 결말을 가진 소설이었지만 인물들의 생각이 깊고 중간중간 생각해볼 만한 말들이 많아서 오래 곱씹어볼 것 같고 후유증도 꽤 오래 갈 것 같은 소설이다. 쉬이 잊긴 힘들 것이다.

준연도, 해원도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선택을 했다. 작가가 왜 이런 선택을 의도했을지는 좀 의문이다. 죄에 대한 대가가 어떤 것이든, 살아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준연은 친구가 더 큰 괴물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미명, 해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자유롭게 놓아주겠다는 미명 하에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회피해버리고 도망쳐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인물들의 선택에 공감하긴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몰아친 원인은 결국 해원이 하진에 대해서 첫 번째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녔기 때문인데, 작가님의 필력이 대단해서 해원에 몰입하면서 읽게 됐던 것 같다. 해원을 방치하고 준연과 작업하고 있는 하진을 원망하고 그녀를 비난했으며 해원의 범죄 계획에 심리적으로 동조하게 됐다. 만약 원래의 계획대로 증류소’만’ 불탔다면 아마 해원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이 계획이 미쳐있었다는 것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책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더 나을 것 없다고 할 정도로 모두 뭔가의 ‘광인’이다. 준연은 어머니마저 외면할 정도로 음악에, 하진은 가족을 모두 잃은 뒤에는 더더욱 위스키에, 해원은 하진을 만난 뒤 하진에 대한 광인이 된다. 이때 이들이 과연 정말 사랑을 한 건지, 단순히 욕망을 한 것인지 경계가 애매하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이들 모두, 그 대상들을 진짜 사랑했다기보다는 욕망했던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보다 소중하다고 여기고 욕망하지만, 책 말미의 해원의 깨달음 대로, 그 대상이 자신을 선택해줘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 대상만을 추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주변의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고 파멸로 몰고 간 것 같다고 느껴진다.

절정으로 치닫기 전 해원이 하진의 증류소로 찾아가 일부 만이라도 같이 일하자고 했다면, 하진이 해원을 밀어내려고만 하지 않고 조금 더 솔직하게 해원에게 감정을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전반적으로 모든 인물들 간의 소통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가장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왜 각자의 생각을 자기만 갖고 있었을까. 더 많이 소통하고 얘기를 나눠봤다면 그렇게까지 파국적인 결말에 이르진 않지 않았을까.

결국 작품이 묻고자 하는 질문도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욕망들 중의 욕망, 가장 강렬하고 순수한 욕망이었다. … 가장 원하는 건 원하는 것만으로 가질 수 없다고, 그 대상 역시 나를 원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사랑한다는 건 그 선택받음까지도 기꺼이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욕망과 구분할 수 없고 그 실현도 본질적으로 범죄와 다를 수 없으니까. – pg. 663 ”

해원은 위와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고, 아마 이것이 작가님의 결론일 것이다. 일견 맞고 일견 틀리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무조건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집착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을 선택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너무 수동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 속 해원의 결론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해주길 기다리는 것은 맞지만, 관계가 지속되고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소통하고 상대방과 맞춰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방적으로 내린 결론에 의거해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결국 관계의 파국만을 가져올 뿐이다.

“보이지 않으면 고칠 수도 없는걸. 봤으면 고치고 시도는 해봐야 할 수 없지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 뭐든 다 할 수는 없으니까. … 애든 어른이든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 하고 그게 맞춘다는 거 아닌가 하는 거죠. 고칠 수 없는 거니까. 이미 그렇게 생겨 먹은 거니까요. 그러면,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고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자기도 힘들 테니까. … 그런 낙을 하나씩 만드는 게 사는 거 아닌가 싶고요. 음, 알아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뭘 자꾸 하고 만들어야 되더라고요. 산다는 게. – pg. 410-411”

주요 인물은 아니지만 강렬하게 나왔던 반데사르의 말이 가장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랑과 결이 같다고 느꼈다. 자기만 발견한 아름다움에 사랑을 시작하더라도, 언젠가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원치 않는 부분을 보게 된다. 그런 상대방의 단점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집착이자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런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되 서로에게 가장 덜 거슬리도록 끊임없이 소통하고 노력해서 맞춰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시도의 연장선으로 둘만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것들을 정립해나간다면, 보다 공고히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화분 같다는 생각을 해. 키우고 기르는 거, 상처도 입히고 잘못도 하지만 계속, 같이 가는 거지.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 다 실수하고 잘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뭘 몰라서, 서툴어서, 우리도 화분 속 화초처럼 아직 크는 중이니까. – pg. 265”

관계, 더 나아가 사랑은 식물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각보다 식물은 강인해서, 며칠 조금 신경을 쓰지 못하거나 살짝 꺾이는 것만으로 쉽게 죽지 않는다. 다시 신경을 써주고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면 알아서 잘 자라는 것이 식물이다. 또 식물을 키우다보면 어느새 훌쩍 컸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런 모든 면에서 참 관계랑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가님의 예리한 통찰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은 거저 생기는 게 아냐. 알아야 생기고 아는 만큼 생기는 거지. 시간이 필요해. – pg. 160”

초반의 불튀는 정열적인 사랑도 좋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 단계를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알게 되고 익숙해지면서 편해지는 데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화분 속의 화초를 기르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맞춰가고 둘만의 추억도 쌓아가면서 관계를 가꾸어나가면서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혁진 작가님의 작품은 처음이어서 전작이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작품에서 느낀 것은 글솜씨가 굉장히 유려하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완벽하게 이 상황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부분들이 있었고, 작가님의 철학적인 사유가 묻어나는 문장들에 읽는 내내 감탄했다. 장편소설로 등단하셨다는 이력도 인상깊어서, 앞으로 전작들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