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글 쓰는 친구가 주고받은 현대음악 같은 교차 일기.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민음사) 2023. 7. 5.~6. 읽음

[comment]
❔주제, 순서는 물론 공간도 공유하지 않은 채 세 명의 친구가 주고 받는 교차 일기라니. 가능하기는 할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데, 그런 일기가 무려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됐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의 글을 알지(혹은 의식하지) 못한 채 쓴 이야기도 계속 쓰다보면 한 데로 모여 어느덧 선을 만들어가는 신비.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작가라는 건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 도시를 넘나들며 점차 하나의 덩어리로 엉켜가는 글뭉치의 시작에는 ‘될까?’ 하는 의문과 함께 ‘되겠다’는 셋의 확신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글을 쓰는 직업 외에도 좋아하고 추억하고 동경하는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고, 그들 곁에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그 대상들을 함께해 온 또 다른 친구들의 존재가 있다.
일본의 영화, 음악, 정지돈과 금정연, 편집자 기현.

➗이야기의 시작이자 가장 기초적인 토대인 세 도시. 서울, 도쿄, 베를린. 세 도시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추억의 수만큼이나 이야기를 마주하는 깊이와 차원 역시 다양할 것이다.
서울과 도쿄와 베를린에 대한 나의 앎의 밀도, 추억의 두께, 호기심의 크기에 따라 세 사람의 세 도시에서의 일과 일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이해와 감상 역시 자연스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이지만 셋인, 묶여 있지만 또 따로인, 느슨한 규칙 속에서도 각자 개성 있고 각각 비슷한 분량에도 읽는 이에 따라 그 여운의 깊이는 천차만별인, 그런 매력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이야기를 매듭 짓는 박솔뫼 작가의 마지막 일기가 참 인상적이다.
쓰기로 마음만 먹고 쓰지 않았는데 이미 쓰인 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일어난 일들. 떨어져 있지만 촘촘히 연결된 사이와 글.
지구 반대편에서 쓰인 글조각들이 서로를 떠올리는 마음으로 이어져 공간의 이격을 극복해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 역시 마음만으로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phrase]
?️바로 손을 흔들지 않는 것 그런 순간에 생각을 해 버리는 것 이것이 나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부끄럽게 하고 어떨 때는 종종 도와주기도 하는 나의 기질인데 이것을 붙잡고 혹은 이것에 붙잡힌 채 앞으로도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 63쪽, 「손 흔들기」(서울의 박솔뫼) 中

?️이방인이 내 삶에 이만큼 가까이 오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다름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결코 평행선에 두지 않으면서도 위험한 강으로 떠내려가게 내버려두지 않는 일. 그렇다면 우리 그러니까 인간은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진가라고 하는 질문들. 아마 답을 내릴 수는 없고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걷어차면 안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 83쪽, 「The Stranger」(도쿄의 안은별) 中

?️이를테면 내가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 파티에 들렀다 한밤중에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프리츠 분덜리히를 들었을 때, 나는 존나 내가 무슨 마차에 타고 있는 줄 알았다. – 140쪽, 「달리기 할 때 듣는」(베를린의 이상우) 中
?️유럽의 풍경은 클래식과 가장 가깝지만 지하는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 같다. 테크노가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 베를린 지하철의 군상들을 담아낼 수가 없다. – 169쪽, 「플레이리스트 # 26」(베를린의 이상우) 中

p.s.1️⃣ 유튜브로 한 번, 도서전에서 또 한 번 추천받았지만 (읽을 책이 산더미라) 가까스로 참아냈던 책. 어느 날 우연히 들른 크지도 않은 책방 <비화림>에 놓인 모습을 보고는 못이기는 척 집어들었다. 고민은 독서만 늦출 뿐.

p.s.2️⃣ 상수동의 햇살 따사로운 책방 <오케이어 맨션>에서 시작하고 끝냈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만끽했을 때의 성취감과 행복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