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그 전작인 <톰 소여의 모험>은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거나 혹은 잘 모르는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초등학생 고학년 즈음 학교 도서관의 권장도서 선정된 <톰 소여의 모험>을 읽으려고 했다가 첫 챕터만 읽고 그만두었던 기억이 있으며 이 책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필자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이 책이 쉽게 읽히고 몰입감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중도 포기자가 많았던 이유는 상당히 많은 페이지 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영상 매체의 즐거움에 빠진 아이들에게 거의 600페이지나 되는 책을 가만히 앉아서 읽기란 쉽지 않다. 이 두 책이 이름만 기억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는 인상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초, 중학생 권장도서목록에서 보았던 기억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예전에 못 읽은 유치한 책을 굳이 찾아 읽을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것을 알게 됐을 때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 도서로 알고 있었던 책이 다른 유명한 책들보다 민음사에서 먼저 출간되었다는 사실에 이 책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랑아 소년인 허클베리 핀은 톰 소여와의 모험 이후 때돈을 벌고, 자신의 후견인인 더글라스 과부댁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헉 핀(허클베리 핀)이 떼돈을 벌었다는 소식에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양육권을 주장하며 헉 핀을 데리고 간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곧바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죽은 듯이 위장하여 미시시피 강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탈출한다. 그곳에서 헉 핀은 더글라스 과부댁과 그의 동생 왓츤 부인의 노예인 짐을 만난다. 짐은 자신이 먼 곳으로 팔려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헉의 죽음으로 마을이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도망쳐 나왔다. 헉 핀은 짐을 고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그 둘은 짐이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주(自由州)로 여행을 떠난다.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흘러가던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런저런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나 헉 핀의 기지와 둘 사이의 신뢰로 두 사람은 자유를 향한 여행을 계속한다. 하지만 짐은 왕과 공작이라 불리던 사기꾼 동승자에 의해 팰프스 농장에 갇힌다. 다행히 그 농장은 헉 핀의 친구 톰 소여의 사촌들이 사는 집이었고, 마침 그곳에 오기로 되어있던 톰 소여와 만난 허클베리는 짐을 빼낼 작전을 세운다. 일련의 과정 속에 짐의 탈출 작전은 실패하지만 톰의 폴리 아줌마가 등장하며 사건은 해결된다. 아줌마가 전해준 사실은 허클베리 핀의 아버지가 죽었으며 짐의 주인인 왓츤 아줌마도 죽으면서 짐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허클베리 핀과 짐의 모험은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국 초기 자유주의의 이념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미국초기 자유주의는 크게 ‘자기 신뢰’와 ‘박애주의’로 구성되는데, 허클베리 핀은 특히 자기 신뢰’적인 미국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기 신뢰(Self Reliance)는 19세기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이 주창한 그의 철학으로 자신이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위해 행동하며, 결과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클베리 핀은 개인의 직감과 참다운 양심이 명령하는 데로 행동하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임기응변에 강하고 재치 있는 행동 역시 논리적이거나 계획적이기보다는 직감을 믿고 그 순간의 판단대로 행동하는 성격을 보여준다. 사실 이 여행은 허클베리 핀의 정신적인 자유를 향한 여행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여행의 목적이 도망친 노예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책의 배경이 된 남북 전쟁 직전 남부에서는 흑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북부보다 약했으며, 철저히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도망친 노예를 보았다면 신고를 하거나 직접 노예를 잡아 주인에게 돌려주어 현상금을 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허클베리는 짐이 도망쳤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직전의 맹세를 끝까지 지킨다. 헉 핀은 짐이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짐을 동정하고, 여행을 함께하며 서로를 친구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허클베리에게 두 번의 위기가 다가오는데, 한 번은 자유시로 가는 갈림길인 케이로에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와 짐이 팰프스 농장에 잡혀갔을 때이다. 허클베리는 도망친 노예를 돕는 일이 범죄이며, 무고한 왓츤 아주머니의 재산을 뺏는다는 죄책감에 빠져 현상금 사냥꾼에게 짐을 넘겨줄 생각을 한다. 그러나 결국 짐과의 우정과 신뢰를 배신할 수 없어 지옥에 가겠다는 각오를 하며 두 번 모두 짐을 구해주려 한다. 그 결정은 사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 결과이다.
이렇게 헉 핀이 남들과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부랑아 신세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는 주정뱅이 아버지 밖에 없었으며,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에머슨 역시 사람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이유는 ‘사회적 구속’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은 사회 속에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개체로서의 자신보다 공동체 속의 자신이 더 중요해진다.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구속될 수밖에 없고 이 구속은 자유로운 행동을 방해한다는 것이 에머슨의 생각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당시 기성세대의 모순됨을 잘 지적할 수 있었던 이유도 헉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서 교육을 받지 않은 헉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항상 불편함을 느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독교는 미국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이런 사회에 구애받지 않고 기독교의 모순점과 종교주의를 허클베리는 풍자적으로 비판해내었다.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허클베리 핀은 종교주의과 반대되는 실증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팰프스 농장에서 펼쳐지는 짐 탈출기에서 그의 실증주의적인 사고관이 잘 드러난다. 팰프스 가족은 착하지만 아둔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아둔한 팰프스 가족은 짐을 제대로 구속하지도 않고 쉽게 탈출할 수 있게 가두어놓았다. 이를 보고 허클베리는 쉽고 빠른 방법으로 짐을 빼낼 방법을 고안해내지만 톰이 탈출은 어렵게 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온갖 괴상망측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탈출을 준비한다. 그 때문에 톰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짐은 죽을 위기까지 처하고 만다. 톰이 주장했던 내용을 살펴보면 지극히 명분주의적인 생각이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지 않아 톰의 성격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이야기 책이나 역사책에서 읽은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면 탈출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서 엘리트지만 융통성 없이 모든 절차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료들이 생각났다. 그에 대비되어 허클베리 핀은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실행하려 하는 실천주의와 실용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600쪽 정도 되는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지만 페이지마다 있는 삽화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 덕분에 쉽고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왕과 공작 에피소드가 가장 재미있었다. 자신이 왕과 공작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두 사기꾼이 보기 싫었고, 짐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두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이 싫었지만 그만큼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비판적인 시점을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유산을 탈취하기 위해 윌크스 영감 연기를 하게 된 에피소드에서 톰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메리 제인에게 사실을 말하는 행동이 직후에 짐에 대해서도 양심의 목소를 듣는 행동과 연결되는 것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W.L 펠프스는 “마크 트웨인은 철두철미한 미국인이다. 만약 외국인이 미국 정신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마크 트웨인을 읽게 하라. 그는 미국인들이 편애하는 월트 휘트먼보다 몇 갑절 더 미국적인 작가이다.”라는 말을 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으며 펠프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어째서 마크 트웨인이 ‘미국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의 자유정신을 이야기하며 청년 독자들을 위해 재미까지 놓치지 않은 세계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