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의 이름, 작품명부터 너무나 멋져서 완벽히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작품.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라는 허세에 찌들어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고 번번이 책장을 덮었던 지난날. 오랜만에 다시 만난 책은 이제서야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내 어두운 눈으로는 아직도 완벽히 품을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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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대적 배경, 정치·사회적 상황을 마주했던 작가만의 철학과 사상이 펼쳐지는데 니체의 영원회귀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 뜻과 상통하는 결말로 매듭을 짓는다. 시간의 흐름이나 인물의 서사로 내용을 풀어간 것이 아니라 작가가 주도하는 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간에 ‘나’를 등장시켜 작가 본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풀기도 한다. 소설을 가장한 에세이처럼, 가상 인물을 통해 그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장치라고 생각이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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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남녀를 주축으로 대비되는 모습을 그리며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옳다고 할 수 있는 삶인가라는 물음을 짓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세상을 향한 태도, 세계관은 어떤 기준을 대어 시비를 가릴 수 있을까? 나는 작품에서 나오는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는 말과 ‘키치(Kitsch)’라는 말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은 의미가 여러 범위로 확대되어 ‘자유분방함’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단어가 본디 어떤 ‘통속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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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통속적인 것 즉 “그래야만 하는” 어떤 현상, 관념, 이상, 체제 등을 그 개념이나 언어에 한정하여 단정짓지 말 것이며 그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획일적인 사고를 주입하고 행동을 유발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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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하고 저속한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등 대립하는 말들은 그 자체로 모순된다. 명확하게 딱 잘라 구분할 수 없고 어느 면에서는 경계가 맞닿아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 자체도 모순이다. 존재를 가벼움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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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했다. 존재에 대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모든 것들을 뒤집는 이 아이러니함이야말로 현실을 대변하는 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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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라는 말미의 문장을 조금은 알 것 같은데, 후에 읽으면 더 이 문장에 공감하길 바란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는 헤세의 『데미안』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소설의 끝에서 나방이 전등 주위를 맴맴 돌았기 때문이다. ‘키치’를 주의하라 했지만, 결국 완벽하지 않은 것이 인간이므로 소설에서 의미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