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더하면 인간이 된다고

전쟁에 출전했던 자작 메다르도는 대포를 맞고 조각난다. 의사들은 자작의 발견된 반쪽만을 봉합해 살려냈고 자작은 본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반쪽은 악한 행동을 하는 ‘악한 반쪽’이었고 마을 물건들을 반쪽내고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사소한 이유로 처형한다.

먼저 말하자면 소설의 완성도는 부족하다.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와 선과 악의 대결을 결혼으로 묶으며 동화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구시대적 구성, 깊은 사유를 남기지 못하는 인물설정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인기 있고 논할 가치가 있는 이유를 보편적 주제를 건드림과 동시에 독자에게 사유를 떠넘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 리뷰도 저자의 의도보단 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선과 악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작품을 말할 때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으나 <반쪼가리 자작>에서는 그 기준에 대해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소설에서는 기준보다는 선과 악을 가진 존재인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우린 이미 악한 행동이나 선한 행동이란 무엇인지 보편적 인식을 통해 알고 있기도 하다.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1) 먼저 자작에 집중하는 시선과 2) 자작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자작은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 한쪽으로 치우쳐진 물리적, 신체적 불완전성과 그에 따르는 도덕적으로 극단적인 불완전성 의미한다면, 타락한 문둥병자들, 선을 지향하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위그노들, 메다르도의 악한 행위를 돕거나 그에게 이용당하는 하인들은 몸은 완전하지만 도덕적 자아의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완전해짐’의 조건은 자작에겐 두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겠고, 다른 이들은 선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되겠다.

해제에서 칼비노가 메다르도를 통해 “도덕적으로 분열되고 상처받고 소외된 현대인들을 표현”했다고 하기에 비판받는 인간의 모습, 칼비노가 당대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은 자작을 제외한 마을의 사람들이 더 적절할 듯하다. 자작은 선과 악을 나눈 하나의 비유로서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단순히 인간이란 선이나 악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가? 현실의 인간은 악과 선이 합쳐진 존재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두 쪽이 합쳐졌다는 의미는 완전함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정상’적 인간은 불완전하다. 반쪼가리로 나뉜 자작이 완전하다는 말은 우리가 선과 악을 한 번에 나누고 싶은 심리적 편안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반쪼가리의 선이나 악은 확실히 하나로 분류되는 완전함을 의미한다. 완전한 ‘악’ 완전한 ‘선’과 같은 것.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를 싫어했지만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고치려한 선한 메다르도 또한 싫어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신의 행동 하나까지 공동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고 참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애초에 악과 선이 공존해있는 존재이다. 선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불완전한 것이다.

 

한편으로 자작의 모습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상화 한 걸지도 모른다. 타인을 악하게 정의하는 것과 자신의 삶을 완전한 선의 추구로 부르는 것. 정작 선하게 살아야 한다면서도 완전히 선하게 사는 것을 거북해하지만 말이다.

위그노들은 악한 자작을 보내고 더 좋은 길손을 기다린다. 그런데 ‘더 좋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위그노들은 선한 자작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하고 결국 배척했다. 그들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대충 뭉뚱그린 그들만의 ‘선’을 지향했다. 실제 행위는 악으로 볼 수 있는, 이기적 행위였는데 말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선을 지향하지만 현실의 악을 마주하며 쉽게 동화한다. 그런 존재다.

소설의 배경은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이다. 물론 칼비노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이는 기독교 동맹과 이슬람의 대결인데, 기독교 세계는 십자군 전쟁때부터 흔히 이슬람 세계를 악으로 묘사해왔다. 그렇다면 상대를 하나의 악으로 보는 전쟁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핵심 메시지는 이런 것이 아닐까. 1)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다. 2) 극단적인 악만큼 극단적 선 혹은 극단적 선의 추구는 불가능하다. 3) 세상은 입체적이다.

계속해서 읽다 보면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악은 선보다 진하다”라는 것이었다. 악은 쉽고 간결하며 욕망에 충실하면 된다. 선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하다. 기술자 치에트로키오도가 처형 기구는 매우 손쉽게 만들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선을 행하는 도구를 쉽게 만들지 못한다. 또한 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선보다 더욱 잘 느끼는 것이다.

선이라는 것은 애매한 것이다. 악은 확실히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파괴적인 감정과 행위와 연관된다면, 선이라는 것은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것 자체로 정의 내리긴 부족하다. 도움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 또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 악은 선으로 물리치면 되지만 극단적 선은 어찌할 것인가. 덜 선한 것으로 물리칠 것인가?

 

반쪼가리라는 것은 대비되는 가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을 의미하기보단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반쪼가리 자작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소설의 전개는 사춘기의 문턱에 다다른 조카의 시야에서 서술된다. 소설 말미에 자작은 하나로 합쳐져 정상적 인간이 되고, 마을은 의사 구실을 못했던 의사인 반쪼가리 의사 트렐로니를 떠나보낸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벗어나 세상을 입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성인소설과 동시에 동화로서 기능하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칼비노가 나의 생각과 같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의 가치, 아니 모든 소설의 가치는 작가와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에도 방점이 찍혀있다.

칼비노가 우리가 한쪽에서 바라볼 때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다른 쪽이 드러남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고 등장인물들 모두를 비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생각에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임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이성으로 생각하는 선은 현실적으로 가혹하며 인간은 본래 악을 더 잘 인지하며 더 잘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메시지가 더 잘 다가온다. 메다르도는 합쳐졌지만 다른 인물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