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2년 발표한 희곡으로 사무엘 베케트는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고도라는 존재를 끝없이 기다린다. 이후에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며 극에 새로운 긴장감을 주지만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희극이 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떼우는 공허한 이야기들만 이어간다. 고도가 보낸 소년이 고도는 오지 못할것 같다며 사라진다. 그럼에도 둘은 고도를 계속해서 기다린다.
*고도란 무엇인가?
저자인 베케트는 사람들의 수없는 질문에도 ‘고도’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를 붙이거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 고도는 사람인가 믿음인가 신인가 소망인가, 어떠한 사회일까 계속해서 생각해본다. 그러다보면 고도가 무엇인지가 중요한걸까? 고도를 기다리는 상황을 위해 고도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신발이나 모자 속을 확인하는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 확인하려 한다. 엉뚱한 곳을 파고들거나 의미없는 행위를 하는 인간의 모습을 희화화 한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행위를 하면서 순간의 안도감을 얻거나, 또 의미없이 반복되는 특정 모습을 투영한 것일까.
포조는 럭키한테 훌륭한 걸 배웠다고 하지만 이내 자신을 못살게 군다며 쫓아낼 거라고 한다. 그는 위선적인 인물로서 이후에는 눈을 잃어 럭키없이 살기 힘든 모습이 된다. 자가당착의 상징이랄까. 헤겔의 노예의 변증법이 떠오른다.
“평생을 난 예수와 비교해 온걸”
에스트라공은 자신은 평생을 예수와 비교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당시의 시민상일까. 강자에게는 조아리면서 럭키에게는 가차없다. 현대에 흔해 빠진 인간상이다.
에스트라공은 도망가다 넘어진 포조를 아벨과 카인이라고 부르고 인류 전체를 언급한다. 포조의 모습을 인간에 빚댄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포조는 계급사회에서의 노동자나 노예 혹은 죄의식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을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각자 어떠한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는 종교적 의미든, 종말론적 의미든 무엇이든간에 우리는 그것을 믿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기억력이 좋지 않은 인물들처럼 살아가면서 그 목적을 잊고, 과거를 잊으며 살아간다.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의 목적은 각자 다르고, 때로는 멍청하고 허무해보일 순 있지만 삶은 어떠한 형태로든 반복되며 지속된다.
우리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무의미함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블라디미르가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듯이 이성은 사라지고 의미없고, 포조처럼 목적이 없어 시간관념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등장인물들은 다소 우스꽝그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하지만 이게 베케트가 바라본 현대의 모습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