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예, 그게 문제예요.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도 당신을 이해한 적이 없었어요. 오늘 저녁까지는 그랬어요. 아니, 내 말을 끊지 말아 줘요.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그냥 들어요. 지금 우리는 밀린 계산을 하는 거예요.
헬메르: 그게 무슨 뜻이오?
노라: (잠시 침묵한 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는데, 뭐 생각나는 게 없나요?
헬메르: 대체 뭐?
노라: 우리가 결혼한 지 팔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당신과 나, 남편과 아내, 우리 둘이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게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노라: 걱정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우리가 한 번도 진지하게 앉아서 무언가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 P114
#1.
19세기 말 당시나 21세기의 지금이나 센세이션한 결말로 기억되는 입센의 <인형의 집>. 이번에 천천히 다시 읽어 본 <인형의 집>은 결말의 파격만큼이나 두터운 담론을 다룬 이야기로 다가왔다. 지금껏 노라가 집을 떠나는 결말에만 집중하느라 보지 못한 채 놓친 것들이 너무 많았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먼저, 노라는 단순히 자신 앞에 주어진 상황들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헬메르를 향해 노라는 말한다. “그래요, 이해하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 시작할 거예요. 나는 사회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밝힐 거예요”(p120). 또한 노라는 자신이 노라는 자신이 “그렇게 아빠 손에서 당신 손으로 넘어갔”(p115)을 뿐이라고 말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종속이 대를 이어 계승되어 왔음을 명확히 인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변화해야 할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행복한 적은 없었”다는 자신을 향해 “놀이는 끝난 것으로 하지. 이제는 교육이 시작되는 거야“(p116)라며 옭아매는 남편에게 노라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내로 교육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에요”(pp116-117)라고. 그리고 집을 나가며 “나는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p124)는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는 이 세상의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으리라.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했고, 여전히 우리가 갈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2.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인물 모두 노동의 경험을 가진 이들이다. 입센은 이들을 통해 여성의 노동과 계급을 이야기한다.
노라의 친구이자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하는 크리스티네는 “살기 위해서 (…) 내 평생,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동안은 언제나 일을 했”다(p91). 그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친구인 노라를 통해 남편이 재직 중인 은행의 일자리를 얻고자 찾아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노라를 둘러싼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노라와 그 자녀들의 유모인 안네 마리는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p56)던 남성들 대신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떼어 놓”(p55)으면서 일을 해야 했다. 부르주아의 삶을 살아가는 노라로선 상상하기 힘든, 노동하는 여성의 삶을 그에게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의외였던 점은 노라 또한 한때는 여성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남편 몰래 돈을 빌렸던 그는 그 돈을 갚기 위해 “방에 들어가 문을 걸고 매일 밤늦게까지 쓰는 일을 했”(p29)다. 하지만 필연으로써 노동을 인지하는 앞의 두사람과 달리 그에게 “돈을 버는 건 참 즐거웠”으며 “꼭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p29).
노동을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노동을 다루는 계급에 따른 이미지가 아주 극명하게 갈라진다. 사실 크리스티네와 안네-마리에게도 노라와 같은, 어쩌면 더 강력한 해방이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3.
노라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던 크리스티네가 뇌리에 강력하게 남는다. 사실 이번 뿐만이 아니다. 2018년 예술의전당이 30주년 기념으로 기획했던 <인형의 집> 연극에서도 그랬다. 공연 자체는 개인적으로 매우 별로였지만, (최근 드라마 ‘슈룹’에서 고귀인으로 열연 중인) 우정원 배우가 연기한 크리스티네만은 달랐다. 카랑카랑한 발성과 꼿꼿한 연기로 표현한 크리스티네는 노라에 가려져 보지 못한 여성 노동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러 오는 민망함과 자괴감. 거기에 친구의 은혜를 갚고자 친구가 돈을 빌린 자신의 전남친 크로그스타드를 찾아가 “나는 내가 어머니가 되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요.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필요하죠. 우리 둘은 서로가 필요해요.”(p93)라며 청혼하며 상황을 해결하려는 모습. 노라의 친구라는 이유로 취직에 성공했지만 노라의 가출 이후 헬메르의 눈칫밥을 먹어야 할 그의 앞날까지. 노라의 화려한 서사에 가려진, “내가 무언가, 누군가를 위해 일할”(p93) 기회를 원하는 크리스티네의 굳건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크리스티네의 시선으로 풀어낸 <인형의 집>도 궁금해진다. 노라를 찾아오기 전까지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노라가 떠난 후, 헬메르 밑에서 일해야만 하는 크리스티네는 얼마나 많은 껄끄러움과 역경을 견뎌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