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벽에 내리는 아찔한 비를 원망합니다. 미친 듯이. _p 72, 별곡·2 中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_p77, 칠월 中
닳도록 읽지만 여름 장마철의 축축한 공기를 느낄 때마다 홀린 듯이 다시 펴보게 되는 시집. 단언컨대 내가 가장 많이 읽었고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다. 시를 잘 몰라서 어느 시대의 시가 어떻고 어느 시인은 무슨 기법을 쓰고 이런 전문적인 얘기는 늘어놓을 수 없지만 허연 시인의 시는 언제나 감성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느낌이 확연하게 든다. 사랑을 얘기하든 삶을 얘기하든 화창하고 청명한 하늘보다는 비 내리는 늦여름이나 찬바람 매서운 겨울이 어울리는 문장인 까닭이지 않나 싶다.
허연 시인의 모든 시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시 세 개가 참회록, 별곡, 칠월인데 이 시집에 세 편이 모두 실려 있어서 지인에게 시집을 선물할 일이 생기면 대부분 『불온한 검은 피』를 택한다. 책깨나 읽었다는 친구들에게도 많이 권한다. 모든 시가 그렇듯이 모두의 입맛에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책 사 읽는 사람치고 좋았던 글을 떠벌거리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시는 어느 순간에는 아찔하게 머리를 내려치다가 어느 순간에는 깊은 생각의 늪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다가 또 어느 구절에서는 머릿속을 뱅뱅 돌기만 하던 감정을 정확하게 텍스트로 표현해낸다. 허연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심장이 울리는 가장 큰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있으면서 마치 흡입력 좋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다음 구절을 읽고 머릿속으로 그 구절을 빨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반드시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구절이 남는다. 나는 아마 올해도 『불온한 검은 피』와 장마철을 보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