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학 입학 성공기를 다룬 책은 많은데, 입학 후부터 졸업까지 이르는 성장 과정을 다룬 책은 없는 걸까? 해외 대학에서 유학한 이야기를 다룬 책은 많은데, 국내 대학에서 공부한 이야기는 왜 드문 걸까? 의문을 거듭한 끝에 결심했다. 그러면 애가 한 번 써 보자고. 그리하여 이 책은 40대 직장 여성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보낸 20대 초반을 돌아보는 성장기가 되었다.” (p.11)
오래 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 첫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는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들이 살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무수한 규칙과 실천방법들이다. 곽아람의 ‘공부의 위로’를 읽으면서 그 책이 떠올랐다. 내용의 유사함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의 위로’에서 저자는 대학에서 배운 교양 수업을 중심으로 지성(知性)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이야기한다. ‘대학 때 작성한 대부분의 리포트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리포트들을 피드백을 포함하여 되돌려받았다는 것도, 그 리포트들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나는 ‘혹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꼭 ‘대학시절’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만큼 의미있었고 즐거웠던 시잘이었지만 나는 내가 들은 교양 수업이 기억나지 않는다. 돌려받은 리포트도 없다. (그 당시 교수님들이 돌려줬는지도 기억에 없다.) 대학 때 쓰던 전공 교재들은 20년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공부의 위로’를 읽다보면, ‘친구들이 수강신청해서’ 따라 신청한 과목이 대부분이지만 그때 배운 것들이 저자의 인생 어느 구석에서든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삐딱한 나는 매 학기 21학점을 꽉꽉 채우면서 수업을 들었는데도 기억에 남는 강의가 없는 것이 ‘내 탓’도 있겠지만 ‘가르치는 사람’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수준 차이’를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저자는 교양수업으로 외국어를 배우는데 원서로 읽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번역서의 문장들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원어로 읽으면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뜻을 곱씹게 되므로 구체적으로 내 것이 되어 손에 잡힌다.”(P.50) 이 부분에서 크게 공감하였다. 나야 남들 다 하는 영어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2외국어로 배운 외국어 한 두개가 있다. 나 역시 원서로 읽으면서 번역서와는 다른 맛을 충분히 맛본 터였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학에서 배우는 교양 수업 몇 시간이 엄청난 지식을 쌓게 할 수는 없지만 이때 배운 교양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지혜, 지식의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대학에서 전공과목 교육이 부실해진 것을 사람들이 걱정하지만, 저자는 교양과목 수업이 망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대학이 교양을 습득하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P.63)
“인도미술사는 무용한 수업이었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었고, 새로운 지식을 안겨 주었고,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안다. 그 수업의 쓸모는 그 수업을 듣겠다 결심하던 시절의 내가, 그 수업이 무용하리라 여겼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 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P.117)
저자의 주장에 공감했던 부분이 있는데, 바로 창의성과 암기에 관한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지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소수의 천재들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번떡이는 아이디어로 가득차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평범한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과 아무 것도 모르고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어떤 것은 직관적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나의 직관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솔직히 후자가 더 많지 않은가? 즐기기 위해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는 공부는 또 즐거우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수업 시간에 읽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내가 살면서 읽은 유일한 아리스토파네스였고, 그 수업 때문에 읽은 볼테르가 내가 만난 유일한 볼테르였다. 소포클레스도 에우리피데스도 몰리에르도 솔제니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접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름들을 다시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을 수 있었다. 교양은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된다.”(P. 169~170)는 문장을 보고 나는 또한번 공감하였다. 저자는 나중에라도 그 이름들을 다시 만날 기회라도 있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 만날 일도 거의 없다.
해외 여행 한 번 가자고 했더니, 우리나라도 구석구석 안가본곳이 많은데 왜 나가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지구상에 그 많은 장소가 있는데, 어차피 못 가본 곳, 안 가본 곳 투성이인데 좀 유명하고 좀 특이하고 지금 나의 생활에서 벗어나 리프레쉬할 수 있는 곳에 가 보면 좀 어떤가? 때로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길도 한 번 가보면 좋지 않은가? 내가 평생 다시 만날 일 없어도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이 남긴 저서 한 권 슬쩍 읽고 지나갈 수 있는 기회라도 고맙지 않은가?
“대학 시절에 수강했던 많은 강의들이 선배들과 동기들의 그럼 ‘추천’에 의해 엉겁결에 택하게 된 것이었는데, 배움을 갈망하는 이들이 한곳에 있으면서 서로의 배움을 공유하고 부추기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겨우 스무 살 남짓한 학생들에게 학점을 잘 주는 강의가 아니라 ‘정말 좋은 강의’를 듣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좋은 강의’를 판별할 만한 식견이 있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대견하게 느껴진다. ‘쉽기만 한 길’과 ‘어렵지만 얻을 게 있는 길’이라는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앎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도 대학의 역할일 것이다.”(P.253)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이 저자가 말한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배움을 갈망하는 선후배가 모여 좋은 강의를 추천하고, 그런 좋은 강의가 많아서 고를 수 있고, 앎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그런 대학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학에서 배운 ‘교양’이 나의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라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렇지 못했기에 나는 책을 읽고 또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