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

실례인줄 알면서도 서로의 가정사를 묻는다는 것과 어떤 효용이나 합리보단 철저한 당위가 지배되는 것은 꿈,미래,실험,공동 중에서 ‘공동’에만 해당된다. 앞에 세 단어는 다 공동을 꾸미기 위해 존재하는 거였다. 모두가 둘러앉은 식탁만큼 평화로워 보이는 것도 없겠지만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나’로 존재해서는 안된다. 너무나 견고해서 그 위치를 옮기기 힘든 식탁이 그 생태계를 잘 설명한다. 힘든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으니 식탁에 둘러앉은 네 이웃은 모두가 그 생활에 달고나 속 설탕처럼 녹아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내가 네 이웃중 한 이웃이 아니라 저 이웃들을 네(니)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이 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던 사람들도 존재한다. 자꾸만 넘어오는 선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단희의 참견은 효내를, 재강의 행동은 요진을 힘들게 한 것과 같이 이웃들은 서로에게 창문을 닫아도 들어오는 분뇨냄새와 같이 스며들어 고통을 주었다. 아이를 위해 지워지는 엄마,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나와 같은 상황들이 지나면 결국 공동체라는 틀만 남고 다 지워져버린다. 그들에겐 냄새만 남을 뿐이다. 가족이나 공동체, 돌봄과 사랑은 인간의 악취를 덮기 위한 허무한 꾸밈용 단어에 그치지 않았다. 공동을 꾸미기 위해 존재하던 꿈,미래,실험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