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 2017년 01월 13일
사르트르에겐 ‘자아에 관한 근본개념’이 중요한 화두였다. 나의 자아(Ego)는 타인의 자아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아는 내 안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을까? 사르트르는 ‘자아’가 형식적으로 질료적으로도 나의 ‘의식’안에 있지 않다고 전제한다. 자아는 [의식의] 바깥에, 더 나아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자아’의 존재감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르트르는 그가 책을 읽는 동안(행위), 책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의식(이해라고 받아들인다)이 있었지만, 진정한 ‘나’는 그 의식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가? 그에 의하면 그 의식은 오직 대상에 대한 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에 관한 비정립적인 의식만 남아있을 따름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비반성된 의식 안에는 어떠한 ‘나’도 없었다.” 여기서 큰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비반성된 의식’은 무엇인가? ‘반성된 의식’은 어떤 모습(양상)으로 설명되는가? 물론 나의 의식 속에 종종 나 자신이 부재할 수는 있겠다. 부인은 못하겠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의식과 인식이다. 사르트르가 책을 읽는 동안 의식의 부재상태였다면, 인식으로 생각해도 될까? 의식(意識)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인식(認識)은 지식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나, 이미 알고 있는 성과를 가리키는 지식에 반해, 인식은 성과와 함께 아는 작용도 포함한다. 사르트르는 단언한다. “비반성된 의식의 기억은 반성적 의식의 소여들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길 바란다.”
에드문트 후설은 그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현상학에서 에포케는 마치 ‘하나의 기적’처럼 나타난다고 했다. 반면 사르트르는 한 번의 단순한 반성행위만으로도 의식적 자발성이 갑작스럽게 빠져나와 독립적인 것으로 주어지기에 충분하다면, 에포케는 더 이상 기적도, 지성적 방법도, 현학적 과정도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후설과 대치된다. “에포케는 우리에게 부과된 피할 수 없는 불안이자 초월론적 근원으로부터의 순수 사건인 동시에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자유와 책임을 언급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세상에 한 번 내던져지고 나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안팎으로 부딪는 여러 상황의 그 모든 것을 오롯이 그 자신이 감수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오로지 혼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 자신을 갑자기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가 아니라 일상이라는 혼잣말도 들리는 듯하다. 이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 인식이 되던, 의식이 되던 간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도 일단 일어설 수 있는가? 아님, 누군가 손을 붙잡아 줄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이 책 《자아의 초월성》은 사르트르의 첫 번째 철학 저작이다. 사르트르 현상학의 머릿돌이 되고, 동시에 프랑스 현상학의 전개에서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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