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유는 여행이다.” 따위의 주제로 진부하지 않은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일 것이다. 토카르추크는 모든 개체의 세포벽을 터뜨리고, 경계를 무너뜨리며, 여기저기 떨어진 파편들을 주워 엮는 방식으로 그 작업을 시작한다. (그가 정말로 폭파시키고 싶은 게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폴란드인지는 조금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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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에 따르면 여행은 떠남이면서 동시에 회귀일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상태나 다름 없지만 사실 움직이지 않는 건 없다-그의 세계에서는 심지어 아파트도 여행 중이다. 여행자는 매여 있으면서 떠나기도 한다. 타자는 박제되어 전시된 존재인 동시에 나 자신, 또는 이웃이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은 지구 반대편이다. 그들은 지도나 단면도를 보며 환상적인 여행을 꿈꾸지만 그것 때문에 길을 잃는다. 욕망과 엄숙함은 뒤섞이고, 사본은 원본을 살해하고, 고통과 희열은 관음의 대상이 되고, 윤리는 양자처럼 아무렇게나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카이로스는 인사를 생략한 채로 인간의 개별 에피소드에 찾아왔다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난다. 병든 육체는 결국 죽음에 이르지만 동시에 불멸을 손에 넣는다. 그런데 불멸하는 영생자의 종착지는 생명이 아니라 플라스티네이션과 판옵티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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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게 말이 되느냐고, 저자에게 묻고 싶지 않다. 그건 마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 쓸모 없다고, 그가 말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게 다 기록된 이야기, 그러니까 포르말린에 절여진 입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하려나? 그러니 뭐라고 지껄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웃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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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책을 읽는 도중에 때때로 구역감을 참을 수 없었는데 그게 토카르추크의 의도인지, 아니면 삶이 으레 그런 것이기 떄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 건 탑승객으로서의 멀미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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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지만 여기에 안식이 있다!”는 식으로 결말을 짓지 않아서 좋았다. 단지 여행의 종착지가 벽이라는 점이 당황스러웠는데, 그건 그것대로 독자(또는 순례자)가 해결해야 할 몫 아닐까? 비행은 계속되니까. 원하든, 그렇지 않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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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중심에는 보물도 없고, 싸워서 물리쳐야 할 미노타우로스도 없다. 길은 갑자기 벽 앞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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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드디어 도착했다. 또 다른 순례자는 지금 플렉시 글라스 속에 담겨 있거나, 아니면 다른 방에서 플라스티네이션 처리가 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을 보기 위해 나는 줄을 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