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삭스.
『데미안』을 읽어보지 않을 사람도 알 법한 유명한 구절이다. 『데미안』은 무척이나 유명한 성장 소설-성장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이다. 『데미안』은 헤세가 1919년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책이다. 이런 이유로『데미안』은 오토픽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우리는 모두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헤세가 서문에서 말하듯, 이 소설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깨닫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의 ‘나’는 의식중의 나와 무의식 중의 나, 크게 두 가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무의식중의 ‘나’는 몽상을 하고, 꿈에 취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에고와 무의식중의 ‘나’를 혼합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미안』이 우리에게 주는 내용은 이분법적 사고관(알)을 깨고 나오자는 것이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혼합하고, 의식중의 ‘나’와 무의식중의 ‘나’를 혼합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키스로 그 둘도 혼합된다. 완전한 상태(압락사스)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