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세상이 멸망해 가는 순간. 부부, 자매, 그리고 일가족은 살 길을 찾아 러시아로 온다. 모든 것을 유예 하게 만드는 내일이 사라지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에 매진하기에 그들은 각자 마음 속에 미루어 두었던 것들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소설에서 최진영 작가는 잔인하다.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관음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으나 동시에 숨기지도 않는다. 그들은 거래의 대상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성노예’로 생각되기도 하며, 큰 폭력에 노출되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전부가 된 시기에 살아있다는 것, 길에서 밥을 음미하며 먹는 것, 누가 보지 않아도 립스틱을 바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감정들을 작가는 놓치지 않으며 섬세하게 묘사한다.그렇게 해가 지는 곳으로는 우리가 유예해온 수많은 감정들과 소중함을 다시 꺼내게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급히 출국해야 했을 때 이 책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 수만의 사망자가 났다. 일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까지 미뤄왔던, 순간들에 대한 소중함을 돌아볼 수 있었다. 공원에서 햇살을 느끼는 것, 외출을 위해 머리를 정리하는 것, 여행의 몽상으로 행복해 하는 것은 당분간 꿈꿀 수 없게 됐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루하루를 음미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중요한 시기기에, 우리는 사랑을 유예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안고 세상의 끝까지, 자가격리속에서 2주 후까지 한발한발 나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