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은 재미있다. 정치 논객, 소설가, 건축가, 물리학 박사 등 전문가들이 각 분야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 다방면에 박식한 매력, 세상에 호기심이 가득한 면모가 흥미 요소일 것이다. 강화도 역사조차 알쓸신잡3를 통해 보면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 된다. 역사 선생님 입으로 들을 때는 유배지였다가 피난처였다가 외우기 급급했는데, 소설가의 입으로 듣는 강화도는 영국 제국주의 첨병이 탐내는 노른자 땅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강화도에는 1900년에 한옥으로 지은 강화 성당이 있다. 한국의 토착 문화에 대한 영국인의 호기심을 알 수 있다. 왜 강화에 성당을 지었느냐면, 강화는 서울에서부터 흘러오는 한강의 하류에 위치했기 때문이라 한다. 필요에 따라 서울에 가거나 서울로부터 도피하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수도로 향하는 외세의 침략을 막기 적합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이 그곳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유가 알 만하다. 강화도가 우리나라의 홍콩이 될 수 있었겠다는 박상욱 박사의 말은 어떤 논리적 비약도 없다.
물론 우리나라는 서구 열강과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영국의 영향이 크게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손길이 직접적으로 빠르게 닿았다. 나이지리아가 입은 피해는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영국은 15세기 초 노예무역부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에 직접적으로 침략하기까지 갈수록 강력하게 아프리카를 침탈했다. 1914년에는 나이지리아 식민국을 세웠다.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종교적 이념으로 사람들을 포섭하고, 영어 교육으로 지배를 용이케 했다. 선발대가 자리를 잡으면 무력으로 백인의 사법권을 행사했다. 선진적인 이념과 기술로 미개한 이들을 돌보되 식민지의 생활상을 탐구한다고 자화자찬했다. 타 문명에 대한 호기심은 그들이 우월하다는 비뚤어진 개방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저자 치누아 아체베는 1930년 11월 16일 나이지리아 이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식민지배 하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의 글에서는 일종의 소명의식이 엿보인다. 침략 전 아프리카 문화의 기억·가치를 되살리고, 문화적 기반까지 말살한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자국민의 자존감과 기상을 드높여 식민 역사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느 나라나 같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침탈의 전후 묘사가 하도 담담해서 ‘일어날 일이 벌어졌을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저자에게는 피해자는 착하기만 하고 가해자는 나쁘기만 하다는 편견이 없다. 아프리카가 자부심을 되찾길 바라는 한편 반성을 요구하는 것 같다.
책은 1, 2, 3부로 나뉜다. 1부는 주인공 오콩코가 사는 마을을 묘사한다. 포카혼타스를 남자 버전에서 보는 것 같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아홉 형제로부터 만들어진 아홉 마을이 교류하며 살아간다. 대지의 여신 어머니를 숭상하고, 뱃속을 울리는 북소리에 맞추어 씨름을 하고, 다른 마을 사람과 혼인하는 이웃을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준비한다. 아이에게 변고가 생기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한 마음으로 걱정한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 머나먼 혈연으로 결속한 사회도 어두운 면이 있다.
오콩코는 마을에서 인정받는 강력한 전사이고 많은 처자식을 먹여살릴 만큼 능력있는 가장이다. 안타깝게도 게으르고 풍류를 즐긴 빚쟁이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유년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아버지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 모든 것을 증오하고, 처자식에게 쉽게 화풀이를 한다. 훌륭한 남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을 쉬이 무시한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그의 행동을 따라가면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을만큼 단점과 강점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2부는 오콩코가 실수로 마을 소년을 죽인 탓에 어머니의 고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이야기다. 영국인 선교사를 포함한 선발대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홉 마을 중 하나가 비무장 선교사 한 명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인 대가로 몰살당한다. 오콩코는 외부인을 이유 없이 죽인 마을 사람들을 어리석다 생각하면서도, 그들이 약해서 당했을 뿐이라 여긴다. 마을 사람들의 가치를 깔아뭉개며 교리를 전파하는 영국인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와 달리, 오콩코의 큰아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말에서 희망을 찾아 교회로 간다.
3부는 화려한 복귀를 꿈꾼 오콩코가 백인과 갈등을 일으켜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유화 정책을 펼치던 선교사가 돌아간 뒤 강성 교회 지도자가 나타난다. 기존의 아프리카 사회에 불만을 품은 교회 사람이 광기를 표출하여 문제가 발생한다. 우무오피아의 관례에 따라 처벌하자 재판소가 끼어든다. 토착민의 관습에 대해 잘 모르지만 교회 사람을 처벌한 사안이니 협의하여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그들의 세력권에 불러들여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백인의 침략 행위가 본격화 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모른다.
이그보 부족의 사회 체계와 가치, 아름다움, 명과 암, 비주류로부터 시작된 필연적인 균열을 책의 반을 할애하여 그린다. 반면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것은 44쪽 만에 끝난다. 허망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고조시킨다. 왜 진작 약자를 포용하지 못했나, 어쩌다 외부인과 교류하는 삶의 방식을 잊고 만 것인가, 침탈이 가시화 되었을 때 항거했다면 달랐을 텐데 라며 탄식하는 마음이 읽힌다.
어찌보면 저자 또한 식민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폭력성보다 이그보 부족의 명암을 안타까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187쪽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 신을 모욕하면,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가 가서 그의 입을 막아야 합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그저 듣지 않으려고 손으로 우리 귀를 막으면 되지요. 그게 현명한 처신이지요.”
세태를 반영하지 못한 가엾은 발언이다. 부정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오콩코는 “겁쟁이처럼 굴지 맙시다”라고 한다. 그럼에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철학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겁먹고 물러선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맞고 돌아온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속상한 마음에 맞기만 했냐고 바보 취급을 할지도 모른다. 너도 때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옳음을 지향할 수는 없게 된다. 올바른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도록 해야한다. 이그보 부족은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물론 정당한 방법으로 항의할 수 없을 때는 결사항전해야 하고, 안타깝게도 오콩코의 경우에도 그랬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을 수 없어 외로웠던 오콩코는 다른 사람들의 미래가 되었을 것이다.
백인의 앞잡이가 된 첫 번째 마을 사람들이 동족을 핍박하는 대목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강화도가 그렇게 될 뻔 했다는 것이 무섭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뮤지컬 <영웅> 중 ‘누가 죄인인가’를 꼭 들어봤으면 좋겠다. 오버랩 되는 부분이 많다. 더 나아가 저자가 바랐을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다. 끝내 스러진 오콩코와 달리,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뜻을 남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절한 좌절, 희생, 싸움의 위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