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아주 이상하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가정하는 상상력의 대담함을 보고 우리는 ‘카프카적인 상상력’이라고 한다. 심지어 ‘Kafkaesque’(카프카적인)이라는 단어가 사전에도 등재되어있다. 도대체 카프카는, 어떤 사람이길래 자신의 이름을 딴 형용사가 사전에 등재되어있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카프카는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들, 현대소설이라는 범주 안에서 창작되고 읽히는 모든 소설들의 형식을 만든 사람이다. 앞서 말했던 그 현대소설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지는 것에 카프카가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과장이 아니다. 그는 현대인의 ‘존재에 있어서의 불안’과 ‘존재로 말미암은 불안’을 통찰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이것이 그가 카프카 – 사르트르 – 카뮈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소설의 대부인 이유이다. 그런 카프카의 대표작이 바로 《변신(變身) Die Verwandlung》 이며, 이 독후감에서는 이 작품이 어떤 존재자의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안을 담은 작품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변신(變身) Die Verwandlung》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독일의 방문판매원인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깨어나보니 다리가 여러개 달린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었고, 그는 결근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당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레고르가 결근을 한 이유가 돈을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회사의 사장은 그레고르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닦달하는데, 이 때 그레고리가 해명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방에서 나와 벌레로 변한 모습을 자신의 가족들과 지배인에게 보여주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지배인은 집을 나와 도망쳤고, 가족들 중 자신의 여동생만이 그레고르에게 식사를 가져다주고, 챙겨주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방문판매원이 아닌, 가족에게 기생충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아 등에 상처를 입게 되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레고르의 죽음을 맞은 가족들은 홀가분함을 느끼고, 간만에 교외로 나가 나들이를 즐긴다. 이것이 《변신(變身) Die Verwandlung》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작품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불안과 그 불안이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렀는지를 이야기하면 될 터인데, 그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카프카에 있어서 불안이란 무엇인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카프카는 사실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그가 하고 싶었던 소설 집필을 하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인 헤르만 카프카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억세고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그로 인해 카프카는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프라하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게 된다. 사실 카프카가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은 소설가 내지 소설 창작이었다. 이것을 성공했다고 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프카는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는 와중에도 밤 늦게까지 글을 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전에 카프카가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고, 그다지 주목받지도 못하였다. 카프카는 결국 1917년 폐결핵에 걸려 1924년에 사망한다. 카프카는 평생동안 글에 대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갈망이 있었으며, 그에 따른 개인의 소외와 무력함을 느꼈다. 이러한 카프카의 삶이 결국에는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큰 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소설로 돌아가 《변신(變身) Die Verwandlung》에서 보여주는 현대인의 불안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 볼 시간이다. 일단 그레고르의 직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레고르는 본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방문판매원으로, 소설에서는 꽤 착실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벌레로 변했을 때, 그레고르가 가장 먼저 느끼는 불안은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결근에 대한 불안이었다. 결국 그레고르는 방문판매원 – 그러니까 일종의 직업, 노동-으로 자신을 투사한다. 그렇게 판매원이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 그레고르의 목적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두 가지의 정언명령을 따라야한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우하라.”이다. 결국 이성 -즉, 자신의 인식적이고 도덕적인 기능 -을 통하여 인간은 어떠한 목적의 ‘수단’이 아닌 합목적성(이 때 내가 말하는 ‘이성’이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판단력과 그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물인 ‘목적에 맞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결국 ‘목적에 맞는다’라는 것은 이성과 오성 즉, 승인하거나 승인하지 않거나,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라는 욕망의 기능과 관련 맺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전혀 사심없는 만족과 불만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인식이다. 칸트는 이를 욕망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 이성이나 오성의 범주가 아닌 판단력의 범주로 보고 이 판단력을 통해 사물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다.)이 되어 실용성, 용도가 없어서 그 자체로 목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와 아름다움 즉,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그렇게 인간은 하나의 이성적 행위자로서 자유인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자신을 용도, ‘목적이 있는 것’과 같은 사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실존에 대한 문제가 생겨난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답변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 (1945)

인간의 실존은 본질, 즉 의자와 책상같은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떤 것의 수단이 되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 존재에게 주어지는 소명과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인간은 이 세상에 누군가에 의해 – (물론 사르트르는 누군가에 의해(by)라는 표현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실존주의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인 철학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철학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 세상 속에서 스스로 방향성을 찾아 인생을 결정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그레고르는 인간으로서 ‘실존’한다고 볼 수 없다. 결국 그레고르의 불안은 자신의 쓸모에 대한 것이며, 그러한 쓸모는 칸트가 이야기하는 ‘목적이 있는’ 사물로 귀결되는 바, 그것은 자신의 존재보다 용도에 자신의 가치를 투영하는 현대인의 어두운 일면이 그대로 포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불안은 그레고르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족들은 생계를 책임지던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자, 그를 식구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직 여동생인 그레타만이 그를 돌봐주는데, 그것도 그레고르가 그레타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방 밖으로 나가다가 손님들을 마주하는 바람에, 그 도움의 손길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어머니는 계속해서 울고 있다. 결국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쓸모’가 없어졌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보고 있던 자신이 객식구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그레고르는 씁쓸해하지만 그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그레고르는 그렇게 상처를 입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그레고르의 죽음을 발견한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죽은 것을 아주 반가워하고, 나들이를 나간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간들의 ‘비인간성’이다. 그레고르의 불행한 삶에 대해서는 분명히 가족들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자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죽이려고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레고르 자체가 벌레로 변신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레고르라는 인간이 아예 다른 벌레라는 종족으로 변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그레고르는 ‘다리가 많이 달린 흉측한 벌레’가 아닌 ‘그레고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모습이 인간이 아니고, 둘째, 그것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족들의 비인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가족 구성원에게도 버림받는다. 이 부분은 어느정도 카프카의 일생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법률가 또는 그가 직업으로 가졌던 보험사 직원으로서의 카프카는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카프카였다. 평생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카프카가 가족 구성원에 대한 비인간성을 이야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결국 《변신》이라는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목적이 있는’ 인간상, 즉, 쓸모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간됨이 증명되는 사실 속에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부조리함에 대한 고발이다. 카프카는 그것을 ‘변신’이라는 모티프를 차용하여 훌륭하게 표현했다. 사실 카프카와 그레고르만의 것이 아닐 이 불안은 현재까지도 현대인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용도’를 넘어서서 우리만의 가치, 자유라는 가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