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게 아닌

이 책의 홍보 문구가 참 자극적인데, 그 시절 아이돌을 사랑하고 팬픽을 읽으며 여자를 사랑한 소녀의 이야기. 누구나 그런건 아니지만 내가 고등학생일 시절에 아이돌을 사랑했고, 팬픽에 미쳤던 기억이 있어서 공감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할때 그게 짝사랑이든, 연애든 나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 사람이랑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자격지심을 가져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게 거짓말 같고, 그때 당시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기 때문에 나같은 애를 너같은 애가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지금의 나라면.. 그래 난 사랑받을 만하지. 나같은 여자가 어딨어. 감사한줄이나 알아라.

 

뭔가 되려고 애쓸 필요없어. 요즘 참 와닿는 말이다. 내게 지금 필요한건 꿀같은 낮잠, 친구들과의 정신없는 수다, 맛있는거 먹고 열심히 요가 하기. 이정도면 완벽하지.

 

얼마전에 30대 여성이 고독사를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한다면 남은 사람들은 그를 어떤 식으로 기억할까. 얼마전에 엄마가 큰삼촌이랑 작은삼촌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너무 잠깐 스쳐가듯 얘기해서 나는 작은삼촌에 대한 얘기인줄도 몰랐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먼저 하늘로간 삼촌을 기억하는 형과 누나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막내 동생이 있었다.

 

나도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때 내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많이했었다. 근데 생각보다 우리과는 여자가 더 많았고, 나와 같이 아이돌을 좋아했던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는데 문제는 직장을 다니면서 일코를 해야한다는게 참.. 그리고 남자친구를 만날때도 이해 못하고 싫어할까봐 초반에는 말하지 못했다. 아니 이런 내 모습도 사랑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차암나

 

그땐 그게 너의 취향인 줄 모르고 그저 남자를 따라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자신의 어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 나타난 작가의 말.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얼마나 썼다 지웠다 했을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목포라는 항구도시가 배경인 이 소설은 90년대 초중반 여중생이 여고생이 되고, 여대생이 되면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에 대해 나와있다.

여중생때 친했던 친구가 사실 자신을 좋아했고, 그 후 멀어진 상태로 고등학생이 되어보니 친구들은 유행처럼 동성연애를 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우연히 들어간 연극동아리에서 만난 한 선배를 좋아하게 되고 서로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던 찰나 선배가 대학을 가게 되고 다른 사람들 처럼 남자를 만나고 점점 멀어져 가는걸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여대생이 되어보니 남들처럼 평범해 보이기 위해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친구도 사귀지만 아직까지 그 선배를 볼때면 그때 내가 느낀 그 감정이 사랑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내가 중학생때 우리 학교도 이런 동성연애가 유행이었다.

그땐 한반에 40명씩 13개의 반이 이었으니 다양한 아이들이 학교에 다녔고, 그중에 동성애자가 없을 거란 생각은 안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런 소문에 휩싸이고 공개적으로 동성연애를 하던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이 소설에서 동성연애를 하던 동창들 중에는 실제로 동성애자로 살기로 한 친구도 있고, 사회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이성애자인 척 하는 친구도 있으며 그때 그건 유행이었잖아 라고 그 시절을 부정하는 친구도 있다.

이건 단순히 그 시절 유행했던 동성연애에 대한 얘기가 아닌 지금 현재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중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회가 이성애자가 옳다고 하는 분위기에 자신이 동성애자인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김세희 작가는 이런 얘기를 쉽게 쓸 수 없었다고 말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