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최근 읽은 세계 고전 중에, 아니 지금까지 읽은 모든 고전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환상과 허구, 현실과 진리에 대한 탐구가 엿보이는 깊은 사고와 아이디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가 경탄스럽다. 왜 그동안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지 않았었는지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픽션들>을 읽으면서 과학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과학에 대한 나의 생각과 엮어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배운 게 과학밖에 없기도 하고 말이다.) 먼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했다. 적절한 환경만 주어지면 무(無)에서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자연발생설은 당시 정설이자 진리로 여겨졌다. 제대로 된 자연과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과학적 실험이란 당연히 없었던 시대,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쓰레기에 벌레가 생겨나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자연발생설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과였다. 자연발생설은 몇 백 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지다 루이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두 플라스크를 잇는 아래로 볼록한 관에 물을 채워 완전히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내 생명체는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이 진행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너진다.
과학은 자연발생설의 성립과 쇠퇴와 같은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지금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모든 과학적 사실들은 언젠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지식수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큼만 현실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말한다. 두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몇십 년 혹은 몇 백 년 뒤면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조차 잘못된 해석이었음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가장 최신의 과학적 진리조차 언젠가는 그것이 환상이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과학적 해석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지식수준으로는 그것이 진리였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멀리서는 사람처럼 보이던 형체가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저 나무 한 그루일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빛을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수준으로는 나무를 10 km 떨어진 거리에서 볼 수밖에 없기에 내린 결론일 수도 있다.
인간은 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과학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해석하고 그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의 작동 원리, 진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열 수 없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흔들어보고, 소리가 나나 들어보고, 음파를 쏴서 되돌아오는 반향을 통해 내부를 추측해보기도 하고, 과학을 이용해 상자 안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상자 내부를 추측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론 내리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내린 결론이 맞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상자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말로 하자면 답을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픽션들>은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 주변에 진실이나 진리란 없다는 것. 우리가 현실이자 사실이자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모두가 허구이자 환상일 수 있다는 것. 설령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임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픽션들>에서는 현실과 허구가 뒤섞이고, 사실과 환상이 뒤엉키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두 편의 단편, <바빌로니아의 복권>과 <바벨의 도서관>은 그러한 관점에서의 주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유의지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이야기를 펼친다. 신과 회사, 자유의지와 복권의 비유를 통해 사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는 서사를 펼치는데 그게 또 너무나 그럴듯하다. 결국 독자는 너무나 당연히 믿고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 단편 소설이 보르헤스의 창작이고 소설집의 제목 그대로 픽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허구의 이야기로 인해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비유한 책, 그리고 그 책들이 존재하는 모든 우주를 비유한 도서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인식이란 영원히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이 단편 속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적혀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 모든 책에 대한 해석들이 적힌 책도 모두 존재하고 있으며 또 그에 대한 해석들이 적힌 책들도 존재하고 있다. 도서관 안에 가능한 모든 글자 조합이 적힌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인간은 찾기만 하면 된다. 해석되지 않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의 해석본을, 또 해석본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해석본의 해석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무한에 가까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중 극히 일부만을 집어 들고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영원히 도서관(우주)의 모든 책(진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단편은 인간은 영원히 우주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인간에게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영원히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그건 아마 인간이 알고 있는 유일하게 틀리지 않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듯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언젠가 인류가 지금보다 진실에 훨씬 가까운 곳에 도달할 수 있음을 믿으며 또 내가 그 발걸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0.99999….. 가 무한히 이어지면 1이라고 적듯이 말이다.(물론 0.9999…. 와 1은 다르지만 인류가 그 정도까지 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인류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과학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미 진실은 존재하고 있다. 인류는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인간이 영원히 밝힐 수 없을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오늘도 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한다.
인류는 무한한 허구 속에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간다.
소설 속 한 문장
사실 ‘도서관’은 모든 언어 구조와 스물다섯 개의 철자 기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변형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허튼소리는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