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수필? 에세이? 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였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가 매우 유명한 스타작가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 1Q84, 최근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 등등 많은 책들의 제목 또한 들어서 알 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작품에는 손이 안 갔다고나 할까.
그러던 찰나 앞서 말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 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아무거나 하나 끌리는 것을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 책은 제목도 기억이 안 난다. 중반까지도 읽지 못하고 접었던 것 같다. 그게 몇 달 전이었는데 이번에 도서관에 가서 잔잔한 소설을 읽고 싶어서 일본 소설 쪽을 둘러보다 우연히 눈에 띈 게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집필한 소설과의 첫 만남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기에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제목에서부터 너무 끌리는 바람에 읽다가 별로면 그만 읽지 뭐 하는 생각으로 빌렸다가 며칠 만에 자투리 시간까지 다 투자해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고등학교 시절 영혼을 나눠 놓은 듯한 다섯 명의 친구 그룹에 속해있던 다자키 쓰쿠루라는 주인공은 홀로 이름에 색깔과 관련된 한자가 없어 알게 모르게 그 안에서 소외감을 느낀다.(다른 네 명은 각각 빨강, 파랑, 흰색, 검정을 뜻하는 한자가 이름에 들어있다.) 그러던 찰나 홀로 고향인 나고야를 떠나 도쿄로 대학을 가게 된 다자키 쓰쿠루는 영문도 모른 채 그룹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이유 모를 친구들의 매정한 외면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다자키 쓰쿠루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상처를 가까스로 묻고 타인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그 사건으로부터 16년이 지난 후 연상의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 다자키 쓰쿠루. 그녀는 타인들과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너는 그 사건으로 인한 상처를 덮어놓았을 뿐 치료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던진다. 그녀의 말을 들은 다자키 쓰쿠루는 과거의 네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사건의 진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보면 별 내용이 없는 잔잔한 소설 같지만 의외로 감정, 사람의 외견, 배경 등의 자세하고도 기발한 묘사와 섬세한 감정 표현이 사람을 훅 끌어당긴다. 큰 사건 없이도 다자키 쓰쿠루의 마음에 충분히 다가가 공감하게 된다. 이 소설을 계기로 다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참신한 묘사와 감정 표현, 절제된 문장 투에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흡입력이 매력적이었다.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 만난 친구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있다. 너를 떠나보낸 뒤로 우리 그룹은 무언가 미세한 틈이 생겨났고 그 틈을 메우지 못해 멀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 다자키 쓰쿠루는 다섯 명을 하나로 모아주고 미세한 균열을 메워주는 사람이었다. 빨강, 파랑, 흰색, 검정이라는 네 가지 색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융화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뿐 아니었을까. 어쩔 수 없이 다자키 쓰쿠루를 외면했던 아카(빨강), 아오(파랑), 구로(검정)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했던 시로(하양)에게도 그 일은 상처로 남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도달할 뻔했던, 그리고 그로부터 16년 동안이나 타인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다자키 쓰쿠루만큼은 아니었더라도.
피해자였던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길은 본인뿐 아니라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나머지 넷의 오래된, 아물지 못한 상처도 치료해 준 길이었다. 누구나 직시하기 힘든 오래된 상처 하나쯤은 있다. 상처와 마주하기를 외면한 채 아물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살짝만 건드려도 안의 곪은 피가 뿜어져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의 상처를 덮어놓고 난 괜찮아, 이제 지난 일인걸 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통해 고한다. 상처를 덮은 뚜껑을 열고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외면하고 있던 과거 속으로 순례를 떠나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네 친구를 만나는 순례를 마친 다자키 쓰쿠루의 이후의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던 그는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아마 좀 더 다양하고 많은 색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가 되어 딱지가 앉은 상처를 완전히 딛고 일어서지 않았을까. 가슴 한쪽을 가볍게 건드리는 잔잔한 소설을 읽고 싶다면 추천하는 책이다.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