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ㅈ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왜 석 장의 사진과 남자에 대해 설명했을까?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떄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라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번에 같은 구절을 여러 번 읽게 했다. 이해가 안 되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었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화자의 말이, 오히려 그 사람들이 더러 더 행복하고 안락해 보인다는 말이 콕콕 찌르는 느낌이다. 서로 행복해 보인다면, 과연 누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행복을 느끼면서도 모르고, 혹을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아가던 것은 아닐까?

 

요조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화내는 것이 싫어 일부러 익살꾼이 되었다. 한여름에 스웨터를 입은 채 하여 사람들이 웃게 만들기도 하고, 아버지의 작은 행동에도 관심을 갖고 화가 나셨을까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남의 시선 때문에 신경 쓰며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은 인터넷이 발전하고, 개인 sns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높아지는 현대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더욱 넓어지는 모습이다.

 

행복에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 할 정도로 나약한 요조는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라는 대목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비관적으로 살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행복과 긍정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왔는지를 알려준다.

 

요조가 술에 중독되고 중독된 술을 그만 마시기 위해 선택한 마약에 중독되는 과정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비롯한 많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인간 실격을 보면서 주인공 자신이 인간의 자격을 실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 사람이 자신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처절하게 담아내는데 그것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고뇌와 고통 속에 있었을지 가늠이 안 되고 그 고뇌가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착잡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어 읽는 내내 단순히 소설로만 읽히지 않았다. 주인공이 이 세상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것만 같았고 주인공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내 주변에도 없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자신이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의 혜택 속에서 느꼈던 고민이 드러나 있는 것도 색달랐다.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집의 사람이지만 자신은 남들이 부럽고 심지어는 밥 먹는 시간이 힘들었다는…… 39살에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자신이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소설 속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저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쓰기 위한 일부분으로만 느껴졌는데 그 사실을 알고 소설이 다자이 오사무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