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
저녁해가 어머니의 얼굴을 비추어 어머니의 눈이 푸르스름하니 반짝였다. 얼핏 노여움을 띤 그 얼굴은, 대뜸 달려가 안기고 싶을 만치 아름다웠다.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귀부인인 가즈코 남매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쓸모없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그 쓸모없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p119
죽어 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헤어나올수 없는 사양斜陽길에 든 화족(귀족) 집안의 장녀 가즈코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얄궂게도 독자인 내게는 결국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인간실격> 김춘미 옮김
p13 – 부끄럼 많은 생을 살았습니다.
p131 – 무저항이 죄입니까.
가즈코가 사랑(?)하는 유부남 작가 우에하라와 가즈코의 남동생 나오지. 헤어나올 수 없는 세계에 침잠한 채 해파리처럼 이리저리 쓸려다니는 우에하라와 죽음만이 해방임을 강변하는 나오지의 체념이 #인간실격 의 요조를 떠오르게 한다.
p164
불쾌하신가요? 불쾌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버려지고 잊혀 가는 여자가 유일하게 부리는 심술이라 여겨,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아하고 품위있게 몰락한 어머니, 생의 의지를 꺽어버리고 스스로 떠난 나오지, 남자의 아이를 밴 후 생의 의지를 재생하면서도 어머니-동생-우에하라 모두의 정체성을 갈구하는 가즈코.
해가 지고 밤이 오고 새벽이 틈타는 이 소설에서 사실 그 누구도 실격 당하지 않는다. 몰락하는 해의 무리는 우아하니까.
p.s. 구성 등 여러 면에서 이전에 읽은 창비에서 펴낸 <사양>이 낫지만 민음사판은 유숙자님께서 번역하셨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