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4
어떤 전쟁이 지나가면
이런 황량한 풍경이 태어나는 것일까
내가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
ㅡ <꿩>
감탄과 비탄을 알알이 꿰어낸 시집
p41
빈둥빈둥 햇살 속으로
이제 발가벗은 너만 오면 된다
사과만 나눠 먹으면
통쾌하게 에덴에 당도할 것이다.
ㅡ <빈둥빈둥>
#유머니즘 에서 읽은 한 편의 시를 갖고 싶어서 이 시집을 들어 왔는데 시인의 말마따마 에덴에 당도한다.
시는 어렵고 지난한 분석의 대상이 아니요, 고통으로 짜낸 한 방울 한 방울의 고독에 그치지도 않음을. 그대로 오롯이 받아낸 삶의 무게, 공격이 대가의 혼을 거치면 이렇게 다시 태어난다.
p104
누가 저리도 환한 기적을 생각해 냈을까
ㅡ <젖은 옷들의 축제>
시라는 환희를 줄기줄기 쏘아대지만 이 시집의 끄트머리는 날카로운 절벽 위에서 사냥 당했던 여성들의 이름을 읊어낸다.
p117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ㅡ <곡시>
미당과 사제 관계였던 사실이 독자로서는 뭔가 역설적인 냉각제가 되지만 서정주가 아니라도 자립했을 것이 분명하며, 노구의 고기 막대기를 휘둘렀다가 방망이로 갚음 당하는 시대에 이르러서 시인의 은사 보다는 김명순과 제인과 노리코, 김수임을 비추는 등대의 직진하는 빛으로써 더 선명하게 각인된다.
p122
가장 맑게
가장 짧은 노래로
어버버 어버버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ㅡ <그러던 어느 날>
p.s. 읽는 내내 멋지다는 감탄이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