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절망과 얼마간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 라고 2년 전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한줄평을 썼었다. 이어 「百의 그림자」까지 읽고, 이야기가 전해주는 절망의 무게에 몸이 짓눌리듯 아파 한동안 이 작가가 쓴 글을 읽지 말자 생각했었다. 그러다 이번 연휴에 인친님 추천으로「아무도 아닌」을 읽고 「백의 그림자」를 한 번 더 읽어보았다. 이번엔 좀 덜 아팠다.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더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직접 보거나 들었기 때문에 절망이 주는 고통에 무뎌졌거나, 책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희망의 줄기를 발견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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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아무도 아닌」 책의 첫 문장이다. 사람을 아무개로 대하기보다 사람을 아무것으로 보기도 하는 세계, 가진 물질의 크기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누어 살아가는 세계는 어떤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곳이다. 이 책에는 그 폭력적인 세계를 살아가며 때로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깊고 진한 슬픔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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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에서 오제의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과 대형마트 잡역부로 개근하고 근면했지만 폐암에 걸려 일을 그만두었고, 고추와 호박 등속을 키운 노부인은 땅이 팔리면 쫓겨날 위기에 처해있다. <양의 미래>의 화자는 어렸을 때부터 늘 일을 했으며, 건물 지하에서 서점 점원으로 근무하던 중 여자 아이의 실종사건의 목격자가 되어버리고 방관자로 손가락질 받게 된다. <상류엔 맹금류>의 제희 가족은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빚이 많아 부부끼리 소소한 선물도 여행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처음 가게 된 여행지 계곡에서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고, 물을 마시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건 상류의 맹금류 축사에서 흘러나온 물이었다.
황정은의 두 소설 속 사람들이 차별받고 사물로 격하되는 모습은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오용 혹은 오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상류엔 맹금류>의 화자는 파산이 몰고 온 큰 빚을 양심과 도덕에 따라 갚으려고 하는 제희 부모의 행위를 두고,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빚이기에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며, <누가>에서 금융권 도급으로 전화상담을 하는 화자가 채무자들로부터 듣는 ‘내일 넣을게요’라는 말은 뻔뻔한 거짓말이 돼버린다. <복경>에서 인간의 웃음은 물건을 팔기 위한 기계적 웃음으로 전락하고, 매니저는 판매원에게 ‘존귀’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말해주는데, 실상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존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도 아닌 사람들을 기억하려고 한다. 어쩌면 지금쯤 경찰은 미제 파일로 넘겨버렸을 그 사건을 기억하며 <양의 미래>의 화자는 밤새, 모든 키워드를 동원하며 피해자 진주의 행방을 좇는다. <명실>에서 어쩌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사람 실리를 기록하기 위해 명실은 만년필을 들고, 제희의 여자친구는 무뚝뚝해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했던, 제희와 제희 가족을 여전히 기억한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황정은 작가 역시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백의 그림자」 해설에서 황정은 작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낸다고 말했다. 전자상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로 무수한 철거‘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또한 소설 속 은교와 무재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간절함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응원하는 심정과 닮아 있다고. 그래서 이 작품은 다시 읽기를 유도하고 또 견뎌 내게 한다고.
그리하여 나는 어렵사리 다시 황정은 작가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아무도 아닌」중 작가의 생각이 제목부터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상류엔 맹금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연약하고 선량했고, 경제적 파탄에도 헤어지지 않고 불행을 모두 감내하는 제희 가족 때문이다. 모든 단편이 마음에 걸리고 아팠으나 앞으로도 황정은 작가의 책은 모두 읽어볼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맹금류가 되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몹시 부끄러워지고 또 두려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