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니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랬다. 그래서 어린이 나라에서 그가 꿈꾸어온 발자취를 한 번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한스 기벤트라는 모두가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아이였다.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에서는 여지껏 단 한 번도 한스와 같은 특별한 인재가 없었기에 한스에게 거는 기대는 남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교장과 교사, 마을의 목사로부터 몇 주 뒤에 치러질 주(州) 시험에 대비하여 이에따른 집중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한스의 노력으로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고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영특한 인재들로 구성된 엄격한 신학교 생활은 조금씩 힘에 부쳐오기시작한다. 모범생으로서의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자유롭게 시를 쓰는 하일러와 친해지게 되면서 한스는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헤르만 헤세 역시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학적 기질이 남달란던 헤세 역시 엄격한 규율과 인습에 얽매인 신학교를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기도 했고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휴학을 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학교를 그만 둔 헤세는 시계 공장과 서점상의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지내보지만 이또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헤세는 자살 기도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고. 이렇듯 < 수레바퀴 아래서 >에 나오는 한스와 하일러의 모습 속에 헤세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극히 자전적 소설이라 하겠다. 이렇듯 당시의 유럽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기였으므로 신학교를 거쳐 수도원에 들어가 목사가 되어 설교단에 서는 일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독일 낭만주의라 불리우는 헤세는 이 소설에서도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모습들에 대한 표현들을 주목하게 하는데 특히 한스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 자유로운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신학교를 나와 노동을 통해 다시금 그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은 독자로하여금 드넓은 전원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아름다움이 글 속에 잘 녹아있었다.
방황했던 헤세의 곁에는 다행히도 어머니란 존재가 있었지만 책 속의 한스에게는 어머니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에 한스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면? 아니 플라이크 아저씨가 한스와 좀더 친밀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면 한스의 결말은 좀더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슈바르츠발트는 ‘검은 숲’ 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의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바덴바덴의 인근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 여행의 팁이라면 팁.
“당신이나 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
플라이크 아저씨의 이 말은 한스의 아버지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세지가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고전판 스카이 캐슬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헤르만 헤세의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