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의 베일

일주일 동안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전 보려고 했던 이 책을 이틀 만에 읽었다. 아침에 읽다 중간에 덮어야 할 때 아쉬웠으니 저녁에 돌아오자마자 붙잡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희한한 건 그토록 쉽고 흥미롭게 읽었던 이 책을 글로 정리하려니 며칠이 지나도 한 줄도 쓸 수 없더란 것.

이 책은 서머싯 몸이 단테의 신곡 중 ‘피아’에 대한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쓴 소설이라고 한다. ‘피아’의 부정을 의심한 남편이 그녀를 자신의 성으로 데려가 죽였다는 연옥편에 실린 이야기를, 몸이 중국 여행을 다녀온 뒤 소설화했다.

배경은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 홍콩이다. 키티의 어머니는 허영심이 많고 남편의 출세가 인생의 중요한 목적인 사람이다. 키티의 아버지는 고압적인 어머니에 억눌려 자유가 없고 가족들에게 돈 벌어다주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동생 도리스보다 예뻤던 키티는 사교계에서 좋은 혼처를 기대하나 어느덧 노처녀가 되어버리고, 동생보다 늦게 결혼하기 싫은 마음과 더 늦기 전에 집에서 내보내려는 어머니의 귀찮음이 맞물려 월터와 서둘러 결혼한다.

의사이자 세균학자인 월터는 키티를 사랑해,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에 전전긍긍하고 우스운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나, 키티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다 키티는 모임에서 찰스를 만나는데, 그는 후임 총독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찰스는 키티를 유혹하고 이후 둘은 은밀한 사이가 된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월터는 키티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찰스와 결혼할 수 있다면 깨끗이 이혼해준다는 것,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콜레라가 창궐한 지역으로 함께 떠난다는 것이었다. 키티와의 관계를 일시적 유흥으로 여겼던 찰스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될 부인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월터와 함께 삶보다는 죽음과 가까운 후미진 중국 마을로 들어간 키티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수녀들, 워딩턴과 그의 동거인 만주족 여인, 콜레라로 죽음을 맞이한 거지 등을 만나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깨닫는다.

키티는 임신사실을 알게 되고 태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걸 솔직하게 월터에게 고백한다. 얼마 뒤 월터는 콜레라에 걸리고, 키티는 월터가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염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키티는 그동안 월터에게 상처주었던 일들에 사죄하나, 월터는 마지막 순간 “죽은 건 개였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숨을 거둔다.

결혼식에서 베일을 썼던 키티는 아마도 ‘사랑’의 의미도 잘 몰랐거니와 ‘사랑’이 결혼생활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키티가 보아온 최초의 부부, 그녀의 부모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없었고 그런 가족관계에서 키티는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헌신을 준비하지도 못한 채 도피하듯 시작한 결혼생활이 그녀의 외도를 시작으로 얼룩져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키티는 한순간도 월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월터는 자신을 배신했던 키티와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죽는 순간까지도 용서할 수 없었다.

“난 아주 서툴고 주변머리가 없어요. 언제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 그렇지 않은 말보다 더 하기 어려워요.” 소설 초반에 월터가 키티에게 고백할 때 말했던 이 문장이 자꾸 생각난다. 서툴지만 자신의 깊은 생각을 조심조심 표현하던 월터가 전염병이 만연한 지역으로 떠나자고 키티에게 말했을 때, 이미 그는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에서 남편을 애도하는 베일을 썼을 키티는 이후 진정으로 회개하고 구원받았을까? 홍콩으로 돌아와 찰스를 만난 키티는 그를 증오하고 경멸하지만, 자신을 욕망하는 찰스에게 한순간 무너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관계를 갖는다. 정념에 한없이 나약해지고, 힘들게 얻은 깨달음도 육체적 욕망 앞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인간의 모습, 이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인생이고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인 걸까.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문장이 다시 의미심장해진다.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