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고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바른 색은 지워질 것이고 다시 냄새가 날 테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다른 색으로 칠하고 새로운 향수를 뿌린다.
그게 견디는 방법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견디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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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더 산다는 게 이토록 간절하고 아슬아슬한 바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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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되는 말을 하고 진심을 전하고 싶은데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머릿속은 더 깜깜해졌다.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쉽고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는 게, 물건과 거주지의 처분, 몇몇 금전 관계의 해결만으로 살아온 날들이 말끔히 말끔히 지워질 수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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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연인보다 특별하고 우리의 사랑은 단단해서 절대 틈이 생길 리 없다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이 얼마나 연약하고 그걸 지켜 나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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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데 그런 감정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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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자신을 구원하고 이 시궁창에서 건져 내 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결혼에 얼마쯤 기대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
그런 짐작속에서도 마음을 쏟고 자신을 잡아 줄 무언가가, 삶의 확실한 기반이 결혼이라는 동아줄이 필요했다.
칼에 베인 것처럼 쓰라린 건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책감과 열패감이 그녀를 두루 할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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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과 배신감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분리하기 어려워지만 그래도 그 두 개의 감정 중에 자신을 더 괴롭히는 게 뭘까 집요하게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배신감 때문에 생긴 구멍이 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두사람을 묶어 주던 믿음과 사랑이라는 유대 관계가 깨졌다는 게 더 마음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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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이 열번이나 등장했다. 그 말은 이 사랑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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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며 살면 어떤가, 현실을 망각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때의 심정에 취해 살면 어떤가.
어떻게 살든 사랑 없이,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랑한다는 건 뜨겁게 살아 있고 싶다는 것, 상대를 향해 타오르고 싶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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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란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할 수도 없고, 그 아름다움이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매혹적이고 감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 만남과 이 시절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꽃을 보지 못하는 게, 꽃잎이 떨어지는 게 견딜 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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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하는 서유미 작가!
그녀는 언제나 담담하게 상실과 이별의 과정을 그려낸다.
한권의 책속에 글자들이 유영하듯, 가만가만 읊조리듯 내뱉는 감정들은 차분하고 먹먹하다.
허구가 아닌, 흔하고 흔한, 보통의 이야기들이라 더 고독하달까.
외롭고 쓸쓸한 이들의 이야기.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받을 수 없는 현실에 슬퍼하고,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현실에 아파하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특별한 사건도, 자극적인 문체나 내용없이도 밋밋하지 않고,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는 서유미 작가는 매번 나를 감탄하게 만든다.
맨 마지막 장 4월이 끝나고 5월이 시작됐다라는 말처럼 관계든, 상처든 아픔이든, 이별이든 끝은 났으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 아닐까.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작을 예견하는, 또 살아갈거라는, 살아가라는 의미를 던지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