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2.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9/10]
오늘 올릴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내가 쓴 모든 서평 중에 가장 씁쓸한 서평이 되겠다. 서평에 앞서 미리 경고 문구 정도는 올려야겠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흔치 않은 수컷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다. 상당히 페미니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자칫 많은 남성분들이 눈살을 찌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서평은 보수주의적 또는 권위적 시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남성분이라면 과감히 패스해 주시길 바란다.
지금의 대한민국, 그 안에서도 딱 중간에 머무는 나이대가 아마도 80년대 초반생들이다. 때문일까 이 책은 10대부터 70대까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함일지 82년생이며 여성인 김지영씨를 주인공으로 그려냈다. 내가 남성이긴 하지만 81년생이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내내 깊은 공감을 하며 시작부터 내달렸다. 또한 비슷한 환경을 경험했기에 그 공감은 배가 되었다. 학창 시절과 그 이후의 사회 생활, 그리고 이어지는 결혼 생활을 하며 거미줄처럼 이어진 주변의 이야기들을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엮어 100년 전이나 혹은 100년 후에도 변함 없을지 모를 저급한 성차별에 대하여 써내려간 책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느낀점이라면 주인공 김지영은 이 시대의 여성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으며, 언니 김은영은 작가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의 언니 김은영은 매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반대로 그의 남동생의 경우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으며 아버지 역시 그 존재감은 여성 캐릭터들에 비해 많이 묻혀 있는 모습이다.
<82년생 김지영>의 내용은 줄일 것도 없이, 가감이 전혀 없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이쯤에서 마친다.
오늘은 책의 내용에 더하여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페미니스트다. 굳이 따지자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 가깝다. 한국의 보편적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치를 떤다. 대체로는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른채 떠올리는 것이 ‘여가부’ 정도일 것이다. 정확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는 여성 해방 운동가도 아니요 여가부를 옹호하는 입장은 더욱 더 아니다. 단지 뜻도 모르고 유교 사상을 외치거나 보수주의, 권위주의 또는 기원도 모른채 마초 문화에 빠져 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가 적어도 앞으로는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김지영씨가 겪은 일들은 나 역시도 겪어온 일들이다. 20대에 들어 중소 기업에서 중견 기업으로, 다시 대기업으로 사회라는 계단을 오르며 마주친 수많은 성적 차별과 그 보다많은 희롱들은 나를 내부고발자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때가 20대 중후반 무렵이었는데 이때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아주 조금 나눠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소외되고 불평등한 이 세상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 없이 평등한 위치에 바로 서고자 하는 여성 해방 이데올로기다.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성’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의 ‘성’이 되겠다. (그러니까 내 몸에는 달린 아보카도가 그녀의 몸에는 없다거나, 그녀가 한 달에 한 번쯤 행하는 행사를 나는 치루지 않는다는 등의 생물학적인 부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워낙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하고 있기에 모두 다 설명을 할 수는 없겠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 공존하는 사회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같은 조건에서도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같은 결과값을 내도 그 대가는 평등치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뿐만일까 남성들은 그들의 기준에서 – 대부분은 나름의 수위가 있다 – 치는 농이 상대 여성에겐 치욕감이나 모욕감, 불쾌감을 줄 수 있고 더 나아가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한다기 보다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알면서 그런다면 처벌을 강화하면 되는데 대체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나라엔 여전히 사회적 교육이 필요하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도록 교육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올바르게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부분은 남성들이 말하는 사회적 역차별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역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차이’와 ‘차별’이라는 두 단어를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한다. 아무리 세상이 평등해저도 생물학적인 부분마저 평등해 질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바로 ‘차이’가 되겠다. 반대로 사회적인 부분에서의 불평등이 바로 ‘차별’이 된다.
‘차이’와 ‘차별’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성차별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니 이 두 단어가 정확히 구분이 안 된다면 지금 당장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차이’와 ‘차별’에 대한 정의를 보고 ‘페미니즘’에 대한 간략한 검색을 해보기 바란다. 그것이 성차별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이다.
이제 우리 사회를 둘러보자. 역사적으로 수탈과 침략을 지속적으로 당해서일까, 아니면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한국 사회는 늘 먹는 것에 허덕인다. 우리는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먹을 것을 대하듯 표현해 마지 않는다. 남성들은 여성과의 잠자리 후 그것을 폄하 하거나 혹은 자신을 조금더 우월한 대상으로 만들 때, ‘먹다’ 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조금 더 보태자면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사실주의 표현을 덧붙여 ‘똑 따…’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나눈다. 때로는 정신적인 사랑을, 때로는 육체적인 사랑을 그 둘은 분명히 분리될 수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후자인 육체적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사내 연애 또는 사내에서의 이성관계가 잠자리로 거듭났을때, 그리고 그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례를 보자. 남성의 경우 우월한 입지에 있다.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영웅에 가까워진다. 심지어 주변 동료들은 그런 그를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인 여성을 보자.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인데 더럽고 불쾌한 그리고 찝찝한 표현들이 따라붙는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불평등이다. 같은 기회를 거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에 놓이게 된다. 누군가는 훈장을 달고 누군가는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내 주변에서 일어난 실제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다.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자신의 외도에 대해 말하는 친구와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그는 결혼을 했으며 슬하에 자식을 몇 둔 – 너무 자세한 정보를 올리지 않기 위해 그저 몇 이라 해둔다 – 그러니까 보편적인 가정의 가장이다. 그는 결혼 전에도 그랬고 결혼 후에도 그랬으며 자녀가 늘어남에도 꾸준히 외도를 이어왔다. 나는 그 친구에게 아내가 저리 힘들게 육아와 살림을 맡아 하는데 외도를 하면 미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 친구는 가장이기에 괜찮다고 했다. 이렇게 힘들게 가정을 건사하는데 술과 여자라도 없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반대로 네 부인이 가장이 되어 집안을 먹여살리고 네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한다는 가정하에 네 부인이 외도를 하면 어쩔래? 라고 물으니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년놈들을 다 잡아 죽일거야.” 참으로 궁금했다. 너는 되는데 아내가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라고 하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안 된다고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방법론에 대한 첫걸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성차별을 없앨 가장 단순한 방법, 그 첫걸음은 상대의 입장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내가 상대가 되어 기분 나쁠 행동이라면 혹은 조금이라도 머뭇거려지는 행동이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러한 방법이야 말로 애초에 분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한 번만 더 생각하자. 우리가 상대를 대할 때, 그것이 어떠한 경우이든 한 번만 더 생각하자. 그리고 행동하자. 이것이 기분 나쁠 행동인가? 뭔가 찜찜하고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행동인가에 대해 한 번만 생각해 보면 대체로 많은 문제들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그것이 사회에서의 성차별이건 명절때 마다 이루어지는 고부간의 갈등이건 간에 단 한번만 더 생각해도 우리 사회는 매우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즘 미투 운동의 바람이 거세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바람직한 운동이라 생각한다. 문화적 시각을 보수주의에 입각하여 연착륙 시키려 한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차라리 이참에 순풍에 돛단듯 이땅에 부조리들을 들어내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82년생 김지영>은 미투 운동 덕분에 더 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가 참 좋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에 많은 남성들이 조금이라도 여성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이땅에 남은 저급한 성차별 문화가 조금이라도 개선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한 마디 더 하자면, 이 책은 이 땅에 태어난 여성들이 공감하며 흐느끼며 볼 책이 아니다. 내가 읽어본 <82년생 김지영>은 남성들이 특히 읽어야 할 책임에 분명하다. 보다 바른 이해를 위하여 읽어야 하고 공감해야한다. 그 공감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바뀔 수 있다. 모든 변화와 혁신은 ‘이해’에서 시작된다. 오늘 글이 길었고 쓸 때 없는 말들만 가득했을 지라도 끝까지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성들이 모두 잘못한게 아니고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기에 이해를 못 하는 것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으로 떠넘기기 보다는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미투 같은 운동에 동참하고 여성은 더 용감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남성은 조금 더 여성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바뀌어가기를 바란다.
이 책은 결코 9점이나 줄 만한 책은 아니라 생각한다. 솔직한 점수는 7점대 정도가 딱 맞을 것 같다. 그럼에도 9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준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좀 더 공감하고 교류하고 이해하고 변화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을 옮긴 글이고 워낙 글도 잘 못 쓰는 내가 쓴 글이기에 자칫 논쟁이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못마땅히 여기는 분이라도 그저 못난 사람이 쓴 그저그럴 듯한 글로 여기고 특별히 논쟁이나 시시비비 하지 않았음 하는 바람이다.
건강한 대한민국, 건강한 사회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갔음 하는 바람으로 씁쓸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