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작가로 알려져 이는 레몽 라디게의 대표적인 작품이 <육체의 악마>다. <육체의 악마>는 당대 유명한 작가들의 극찬을 통해 단숨에 유명세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레몽 라디게가 열일곱살에 작성했다고 알려진 이 소설은 정제되어있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의 서술에는 그 어떤 포장이 들어있지 않다. 열 일곱살이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도 파격적이지만, 이 소설이 고작 열일곱살의 작가가 쓴 것이라는 데에 더 놀라움을 자아낸다. 내가 열일곱살일때에는 그저 학교에서 주어진 내용을 머릿 속에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 책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서 느끼는 감정들은 아주 투명하다. 솔직하게 자신이 사랑에 빠진 상대를 질투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남자들이 흔히 생각은 하지만 통념상 드러낼 수 없는 생각의 단편들도 종종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르트 혼자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를 나는 쉽사리 용서하려 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를 속인 것이었다면 나는 그녀를 더욱 용서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어떤 때엔 나는 마르트가 우리 사랑을 좀 더 지속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으며, 게다가 그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니라고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P. 124
날 것과 같은 솔직한 심리 서술이 이 소설이 당대의 작가들이 그렇게 열광하도록 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출간된 이 후, 출간된 <도르작 백작의 무도회>는 소설의 완성도 면에서 <육체의 악마>를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어 나오지 않으 듯 하다.
작가, 레몽 라디게가 20살에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에 이르지 않았다면 더 좋은 소설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인상 깊은 구절
P. 56
나는 내 우정에도 그런 애무는 허용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직 사랑만이 여자들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한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로 절망하기 시작했다. 사랑 없이 지낼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마르트에 대한 아무런 권리 없이는 결코 지낼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개탄스럽다고 여기면서도, 사랑을 하기로 결심까지 했다. 나는 마르트를 갈망했는데, 그 사실을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P.76
조용한 죽음은 혼자서 생각할 때만 문제되는 것이다. 둘이서 죽는다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조차 이미 죽음이 아니다. 괴로운 것은 생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에다 하나의 뜻을 주는 것에서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우리 생명일 때, 함께 사는 것과 함께 죽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P. 172
마르트가 없는 인생이란 하나의 기나 긴 항해와 같았다. 나는 목적지에 다다를 거인가? 마치 처음으로 뱃멀미를 겪을 떄, 항구에 닿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기를 바라듯이 나는 장애에 대하여 마음을 쓰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좀 덜해진 멀미가 나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육지를 생각하게 하는 여유를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