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이상 유자녀 부부로서 10년 내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한다는 조건에 입주자격이 주어진 ‘실험공동주택’이라는 작위적 공동체가 배경인 소설이다. 이 축약된 공동체를 통해서 현실적 상황과 괴리된 출산정책, 성추행의 본질적 경계성, 자기이익 최우선의 개인주의, 여성주의의 환기 등 ‘공동’이라는 연대의 선의(善意) 뒤에 숨은 위선과 그 환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출산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생계벌이의 전선에서 퇴장하여야한다. 이를 위해서 생활경제의 안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외벌이 가족만이 입주가 가능하기에 네 이웃의 부부 중 한 사람은 각기 직업을 가지고 있으나 그 역시 시원찮다. 급여가 제 때 지급되지 못하는 불안한 직장, 혹은 친척 약국의 사무보조라는 임시직처럼 안정적 경제가 담보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계의 지속성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은 여성에게 부과되어 아동도서 그림을 그리는 프리랜서가 되어 납기에 시달리거나 중고의류와 염가 사이트를 헤맨다. 자기 아이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정도이니 쓰레기 분리수거 등 소소한 공동체의 부담에 참여하는 것이 관심대상이기에는 벅찬 것일 뿐이다. 그러니 애초 이들이 아이 셋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망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교외의 12 세대짜리 공동주택의 입주조건과 실험이라는 국가 정책에 내재된 비현실성, 현재적 삶에 대한 몰이해의 그 허구성의 신랄한 비판으로 읽히는 이유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 자녀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금과 지원 정책의 허구성, 기득권을 지닌 부유층 이외에 대부분 서민계층의 복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책의 환기이다. 현실의 경제 환경 하에서 세 자녀씩이나 낳는다는 것은 요원한 사치이자 공허한 망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설 속 입주자들은 이미 국가가 내건 입주 조건을 지키겠다는 내심의 기약이 없다는 점에서 그 정책적 비현실성은 더욱 고착된다.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은 국가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업인 만큼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뒤따를 테고 관리 집행이 잘 안되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사업자체가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다.” – P 43中
대중의 현실적 삶과 국가 정책 사이에는 커다란 불신의 심연이 놓여있다. 기득권은 쉽사리 놓아지지 않는다. 기득권의 또 다른 측면에서 남성중심의 사회체제와 그들 언어에 내재된 휘발성과 은밀성에 깃든 위선의 양식에 대한 비판은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한다.
여섯 살 딸아이의 엄마인 요진은 약국 사무보조원으로 무기력한 남편 은오에게 가사를 맡기고 불안정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입주자인 신재오의 차량 수리로 인하여 출근 방향이 같은 요진은 내키지 않는 동행을 감수한다. 이웃집 남자 재오는 동행하는 차내에서 “….하도 조용히 살아 그런가, 요진 씨 소리 지르면 어떻게 되나 들어 보고 싶네요.” 라고 요진에게 모호한 말을 건넨다.
“발화 당사자의 미묘한 제스처나 그 자리의 공기, 청자의 심리가 지워진다는 점이, 언어 자체가 지닌 약점이었다.” – P 120中
소리 지르는 거 듣고 싶다는 말, 그리곤 “강압성이 친절함과 친근함의 외피를 뜯고 새어 나오는” 비밀스럽고 은밀함 못지않은 추진력을 지닌 둘만의 저녁 식사를 제안한다. 점점 집요해지는 이웃집 남자의 치근거림, 요진은 남편 은오에게 이같은 사실을 말하고 해결키 위해 직장을 조퇴하고 집에 달려가지만 그녀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남편과 이웃집 여자 교원과의 친밀한 대화의 모습이며, 방치된 딸아이의 고통을 목격하는 것이다.
실망한 요진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은오의 내심의 목소리는 아주 흥미로운 남성의 모순된 심리를 엿보게 해준다. 불규칙적이며 턱없는 생계비로 인해 절약과 수치심조차 모르고 살아가야하는 이웃집 여자 교원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강교원은 누군가에게서 베풂을 받는 감각,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는 기쁨이나 온전히 자신에게만 제공되는 물건이 일상에서 어떤 활력과 변이를 가져오는지 좀 더 자주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 P 148中
그래서 공동체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원과 나들이를 하며 소비한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여야겠다는 내심의 다짐을 하는 것이다. 아내 요원 또한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성적 무지의 시선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시선은 오랜 관습적 비합리성과 도덕적 불균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의 고발이라 할 것이다. 요원은 딸 시율만을 안고 떠나버리는데 남편 은오는 이 행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지닌 기득권의 본질을 깨닫는 것, 그 껍질을 벗어던지는 것은 결코 자발적 수행이 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아마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자극의 강도를 높이며 상실의 고통을 겪게 하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진이 실험공동주택을 등지고 떠나는 택시 안에서 그녀의 코를 찌르는 축사의 악취를 차단하기 위해 차창을 닫으려하는 장면의 묘사는 불온한 현실을 막아내려는 강고한 몸짓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설은 공공선이라 가장된 공동체 명의의 행위 이면에 놓인 개인의 삶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의 토대에 세워진 환상의 신랄한 발가벗김, 바로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