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다.
요조를 공감해보고 이해보려 노력하였으나 쉽사리 되진 않는다 .
그의 어두운 내면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소설에서 밝혀지지 않지만 ( 아버지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일정부분 우리 모두와 닮은 부분이 있다.
요조는 처음부터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지 않았다.
세상에 동화되보려 하기도하고 어울려 지내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것의 방식이 ‘익살’이었는데 이는 마치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사람을 두려워 하지만 어쩔수 없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진짜 내면을 가면속에 숨기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발버둥치며 요조는 익살꾼임을 자처했지만 결국에는
다케이치에게 자신이 그린 무시무시한 도깨비 그림을 보여준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내면일까.
겉으론 남들과 동화하기위한 노력으로 익살을 부리지만 속에는
어둡고 무시무시한 도깨비 그림을 가슴속에 품고있는 요조처럼.
요조는 잘생겼다.
왜 주인공들은 다 잘생기고 예뻐하야 하는지 살짝 식상해지기도 하지만
요조가 잘생김으로써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생각해봤다.
일단 잘생기면 사람들이 주변에 몰리게 된다.
외적인 부분에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여자들이 홀딱 반할거라고 말한 다케이치의 말은
단순히 요조가 잘생겼기 떄문만은 아닐것이다.
시즈코의 말은 다음과 같다
” ….당신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뭔가 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져. …. 언제나 쭈뼛쭈뼛 겁먹고, 그러면서도 익살스럽고, … 가끔 혼자 굉장히 침울해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이 더 여자의 마음을 흔들거든.”
겉으로는 익살스럽지만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겁먹고 어두운 그런 가면을 쓴 요조에게 여자들이 매력을 느꼈겠으나
잘생겼다는 의미는 세상과 동화되기 쉽게 태어났지만 내면 깊숙한 어둠으로 인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의미가 있지 않나하는 추측을 해본다.
전반적인 소설의 분위기가 어둡다. 대표적으로 죽음을 행복한것으로, 기쁜것으로 표현하는 반면 삶을 괴로운 것으로 묘사하는 대목들이 눈에 띄인다.
그중 처음 읽을때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요조와 호리키가 단어를 가지고 비극명사 희극명사를 나누는 놀이를 하는것이다.
거기서 요조와 호리키는 삶과 죽음에 대한 희비극을 나눈다.
죽음은 희극이지만 삶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삶이 비극인 이유는 만약 삶이 희극이라면 모든것이 희극이어야 한다는 이유다.
맞다. 산다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살면서 괴로움, 두려움,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니..
하지만 요조같이 그러한 이유로 자기비하, 염세주의에 빠진 들 무슨의미가 있는가 싶기도 하다 .
인간실격의 의미
– 결국 요조는 정신병원에 수용되며 자기자신을 인간실격자라 표현한다.
인간실격자란 누구일까.
세상과 동화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어둠으로 자기자신을 갉아먹는 인간이
인간실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뒤에 짧은 단편 직소는 가룟유다의 시선에서 본 예수의 행적을
소름돋게 잘 표현한것 같다.
그러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식을 앞의 인간실격과 더불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