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한줄 : 아름다운 풍경의 끝자락엔 허무감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7page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설국이라는 소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문장이다. 신감각파를 대표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도입부이다. 문장을 따라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면, 가보진 않았지만 니가타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까만 어둠을 통과하여 도착한 기차역엔 눈이 가득 쌓여 밤하늘의 색과 대비되는 풍경이.
소설의 도입부(네러티브 훅)부터 하얀색이 등장한다. 이는 소설 전체를 아우르며 소설의 허무주의적 태도를 대변한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 사이의 관계나 감정에 대한 명확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주인공인 시마무라와 게이샤인 고마코의 치정에도 불구하고 치정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모호한 표현이 주가 되다 보니 아마 그 표현의 대표색이 하얀색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색깔에 관한 이야기는 설국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는다. 소설은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시작하고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로 끝이 난다. 아래에서부터 시작한 백색의 풍경은 소설 말미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자연의 섭리는 모든 것이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부유한 삶을 살며 이렇다한 수입도 없지만 유산으로 살아가는 시마무라에게, 도쿄에서 니가타로의 몇 년간의 왕복이 결과를 맺는다고 보아진다. 시마무라에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시마무라에게는 무언가 하나 비어있는 사람의 느낌이 전해진다. 현실 속 누구에게나 머릿속에 떠도는 부유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시마무라에게도 내적 부유물이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촤악 가라앉게 되는 듯 보인다.
소설 중 가장 큰 사건이 은하수가 내려오기 직전에 발생한다. 소설 도입부에서 만났던 유코의 죽음이다. (이렇게 소설의 처음과 끝이 완벽히 대치된다.)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유코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녀는 유키오라는 남자를 간호하고 있었다. 소설의 시작부터 등장하며 강한 인상을 주는 이 인물은 시마무라와 직접적으로 자주 만나는 인물로 설정되지 않는다. 고마코라는 게이샤가 시마무라의 주요 상대라고 볼 수 있다. 고마코는 소설의 희끄무레한 명도에 채도를 높여준다. 작가가 그녀에게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여 깨끗함이라는 이미지를 입혀주었기 때문이다.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등장하지 않고 그녀의 행동으로서만 유추할 수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중에도 중간에 몰래 빠져나오기도 하고, 물건을 두고 갔다는 핑계로 시마무라의 방으로 이따금 찾아오기도 하는 식으로. 외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시마무라 역시 고마코에게 감정적 이끌림을 느낀다.
‘애당초 오직 이 여자를 원하고 있었음에도 여느 때처럼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았다고 분명히 깨닫자, 시마무라는 자신이 싫어지는 한편 여자가 더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 30 page
요코가 간호하던 유키오라는 남자가 죽고, 세 번째 방문에서 유코와 시마무라는 처음 대화를 나눈다. 유코에게 호감이 있던 시마무라는 대뜸 유코에게 도쿄로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말하고 마음을 놓아서인지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요코에게 시마무라는 이상한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오히려 고마코에 대한 애정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처녀와 도망치듯 돌아가 버리는 것은 고마코에 대한 지독한 사죄의 방법일 듯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어쩐지 형벌 같기도 했다.’ – 117 page
1년에 한번 니가타를 방문하여 고마코를 찾는 것에 대한 시마무라의 반성의 독백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고마코에게 돌려줄 수 없는 사랑을 회피라는 방법을 통해 면죄받으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감정에 반하는 행동이기에 형벌이라고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무색의 요코는 화염에 갖힌 건물에서 빨간색 기모노를 입은 체 불을 피해 뛰어 내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추락의 형태가 아닌 수평의 모습으로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죽음이 도래하는 순간은 다소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낮은 호흡으로 묘사되던 풍경들이 다른 호흡법으로 묘사된다. 죽음의 순간 빨갛게 타오르는 건물과 그 속에 있던 빨간 기모노를 입은 유코의 추락, 수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수평으로 내려오는 추락.
‘왠지 죽음은 떠올리지 않았으나, 요코의 내부에서 생명이 변형되는 순감임을 느꼈다.’ -151page
시마무라는 요코의 죽음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작가가 표현하기에도 죽음을 익히 알고 있는 형태의 죽음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무채색의 희끄무레한 표현들이 모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설국은 강한 줄기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 아니다. 구름처럼 퍼져있는 소설이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각자가 느끼는 것이 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