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전세계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사람들은 러시아로, 대륙의 끝으로, 해가 지는 곳으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소설은 도리와 지나, 건지와 류 네 사람의 관점으로 흘러가는데, 소중한 가족을 잃기도 하고 상처가 있는 네사람은 각자의 길에서 서로 만나고 알아보며 헤어지고 재회한다.
재난 소설이라기보다는 재난을 배경으로 사랑을 말하는 소설.. 주된 코드는 퀴어였지만 읽으면서 그 사실이 그렇게 부담스럽게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희망은 과거의 상처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의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저 현재를 살아가는 것, 미루는 삶을 끝내고 사랑하는 것. 인간성이 극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폭력과 생존 본능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오히려 사랑만이 남고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지켜야 한다.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집엔 언제 가느냐고 해민이 또 묻는다면 대답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설명해야 한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p.100)
우리의 기적.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B,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어떤 이는 지름길로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