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건드리지 마라!’는 말은 맥락에 따라 가벼운 농담처럼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엄중한 경고를 담고 있다. 사람들에게 가족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구별해서, 지켜야 할 무엇’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가정은 단순한 구별이나 보호의 대상을 넘어 다른 영역에 가 있다. 가정은 타락한 현실이 아니라 거룩하고 신성한 영역에 자리한다.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적어도 가족에 관한 ‘이미지’만큼은 신성불가침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정을 ‘추구’하며 산다. 결혼은 사회구성원으로 살기 위한 기본 조건 중 하나이며, 그 조건을 채우지 못한(않은) 사람은 결함이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많은 이들은 가정을 만들고, 꾸리며, 지키기 위해 살거나 혹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은 마땅할 뿐 아니라 숭고한 사랑으로 여겨지며, 부모를 향한 자식의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정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래야만 한다.
가정에 관한 이와 같은 환상은 어디에서 비롯 되는 것일까? 그 가치는 인간 본래적인 것일까? 혹, 우리 것이 아닌 가치를 자기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 <다섯째 아이>(도리스 레싱, 1988)는 위의 물음 만큼이나 불편한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연말 파티에서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두 사람은 “퇴보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보수적”(7)인 인물들로,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운 1960년대를 상징하는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존재들이다. 파티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있던 그들은 서로가 같은 부류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 챈 것이다. 서로의 목표는 동일하다. 완벽한 가정을 만듦으로써 행복을 움켜잡는 것이다.
그들은 단숨에 결혼한다. 그리고 도시에서 떨어진 시외에 많은 방이 있는, 지나치게 큰 삼층짜리 대저택을 구입한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그 집에서 많은 아이를 낳아 행복하고 완벽한 가정을 이룰 것을 기대하며,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해리엇은 곧 임신을 하게 되고 첫째 아이 루크를 낳는다. 그들 부부가 만들고자 했던 행복의 실현이 시작된 것이다. 둘째, 셋째, 넷째 아이까지. 서둘러 아이들을 낳는 해리엇을 주변인들은 만류하지만, 부부는 자신들이 옳고, 행복하다고 믿는다. 흩어졌던 가족들은 휴가마다 그 저택에 모이고, 아이들은 사랑받으며 뛰놀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그들의 행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태아의 움직임이 여느 아이와는 달랐던 것이다. 해리엇은 이제 2개월 밖에 되지 않은 뱃속의 태아를 ‘그것’이라 칭하며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는 누더기를 깁듯이 조각을 붙인 측은한 짐승을 상상했다. 그건 자신에게는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그레이트 데인 같은 큰 개나 보르조이 같은 러시아 개와 작은 스파니엘의 합작품, 사자와 개, 덩치 큰 짐마차 말과 작은 당나귀, 또는 호랑이와 염소의 산물. 그녀는 어떤 때는 발굽이, 어떤 때는 갈고리 발톱이 그녀의 연약한 내장을 자르고 있다고 믿었다.”(57)
해리엇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자신 안이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녀는 뱃속에 있는 태아가 인간과는 다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괴이한 상상을 한다.
“시골길을 행보하거나 질주할 때 그녀는 커다란 부엌 칼을 잡고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을 했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이 마주칠 때 해리엇은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66)
그렇게 벤이 세상에 나온다. 벤은 정상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딘가가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소설은 다섯째 아이 벤을 마치 작은 괴물처럼 묘사한다. 벤은 짐승처럼 먹고, 포효하며 으르렁거린다. 벤은 사회에는 어울릴 수 없는 야생의 무엇과 같다. 벤은 길들여진 작은 동물들을 죽인 후에도 죄책감은 커녕 승리에 도취된 섬뜩한 표정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벤은 악한 존재인가? 그런 벤을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남편 데이비드를 비롯해 다른 가족들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 벤을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벤이 없는 동안 집은 다시 행복을 되찾은 듯 하지만, 해리엇은 요양소로 찾아가 벤을 집으로 데려오고, 그로 인해 남편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다. 친척들은 더 이상 그 저택을 찾지 않으며, 다른 네 명의 아이들마저 집을 떠난다. 행복으로 가득한 듯 했던 커다른 집과 식탁에는 해리엇만이 홀로 남게 된다.
그들은 무엇을 잡으려고 했으며, 왜 그것을 놓치게 되었을까? 요양원에서 벤을 구출한 해리엇의 선택은 옳은걸까? 과연 벤은 어떤 존재일까?
소설 <다섯째 아이>를 읽고 나서, 우리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소설에는 아름다운 문장도, 화려한 수사도, 밑줄을 그을 만한 경구도 없다. 오히려 소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장(章) 구분 없이 한 호흡에 읽도록 쓰여진 구성은 물론이고, 늘 숭고하게 그려졌던 가족과 자녀, 임신과 출산 등을 섬뜩한 분위기로 묘사하는 서술 방식 또한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소설이 벤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해리엇은 벤을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행복한 가정을 위해, 다른 네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벤을 요양원에 버려 두었어야 하는가? 무엇이 윤리적 선택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가족애란, 모성애란 과연 존재하는가? 행복이란 실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손에 쥘 수 있는가? 해리엇은 이렇게 말한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159)
그들이 잡으려고 했던 건 허상이 아니었을까? 자기 것이 아닌 가치를 자기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만 하고, 이뤄야 하며,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엇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들의 그런 믿음은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벤이라는 완벽한 타자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
벤은 허구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빙하기 인간의 유전자가 오늘날 인간에게도 전해내려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상상력을 펼쳐 <다섯째 아이>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벤은 허구인가? 벤은 공상과 현실의 경계에 아슬히 걸쳐있는 채로 우리를 관찰하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가장 사실적인 존재가 아닐까.
“몇 번인가 해리엇은 밤중에 깨어서 어스레한 어둠 속에서 벤이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