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직전에 그 짧은 빛이 있다
만약 착한 새가 있다면 노래하지 않을 테지”
ㅡ <눈 먼 여자였다가, 김이듬>
겨울이 오고 있을까. 겨울이 마저 오기 전, 아주 짧은 빛이 내 동공을 통과한다면 나는 그 작은 새를 떠올리며 허밍으로 노래부르리라. 착한 새가 아니라도 좋아…너의 말이 다소 거짓과 과장이라도 좋아…네 색깔에 네 한기에 취할래 네 검은 흑발에 얼굴을 묻고 울 수 있다면….
그녀의 시를 만난건 나에겐 큰 위로…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부목(浮木) 하나를 발견한듯 애뜻하고 간절한 운명…눈 먼 여자가 눈 먼 여자를 알아보고…말 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의 찢긴 일기…착한 새가 아니라도 좋아 그녀의 노래가 위악과 발악에 가까운 비명이라도 좋아 피투성이 노래라도 난 사이렌의 노래 쪽으로 기꺼이 내 두 귀를 열거야. 언제나 피투성이의 “간주곡”인 그녀의 곡조, 그녀의 몸에서 “분비되는 리듬”에 반응하며 난 온몸으로 공명하는 또 하나의 눈 먼 악사가 될래.
그녀의 첫시집을 읽던 눅눅하고 춥던 한밤을 떠올린다. <별모양의 얼룩>을 읽으며 엄마없이 초경을 맞은 소녀의 하얗게 질린 사색의 낯빛을 떠올렸지…물류센터에 버려지고 방치된 오물덩어리처럼 썩은 물과 악취 흥건한 채 축하받지 못하고 여자가 되어 버린 소녀의 막막한 어느 하루…더러워진 속옷을 비벼 빨며 아마도 죽고 싶었을 거야…그 슬프고 당혹스러웠던 날들을 잊을 수는 없다. 없지. 없을거야…그 날것 그대로의 비린 생체기들이… 압젝트 당한 바리데기의 증오와 고통의 나날들이 이제는 치명의 시가 되어 치유의 노래가 되어 한줄기 빛이 되어 이 지옥같은 어둠의 생 속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부인할 수 없으리.
<표류하는 흑발>…그녀의 신간 시집을 제일 먼저 읽는다. 많이도 떠돌았다. 많이도 젖었고 오래 고단했을 그녀의 노독을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겁없이 내리막길 치닫듯 읽어내려간다. 먹먹하고 막막하지만 숨이 틔는 이 느낌…
난 그녀가 표류하기에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녀의 축축하고 긴 머리칼이 메두사의 그것임을 알면서도 이번에도 정면으로 마음껏 응시하기로 한다. 세이렌의 노래 쪽으로 고개를 한껏 기울이기로 한다. 한번 더 맹목적으로 그녀를 마음껏 사랑하기로 한다.
“마저 이 세상을 사랑할 것처럼”……하염없이 이 가을, 그 빛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