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작가와 만날때, 소설은 겉표지나 뒷 표지, 제목 또는 목차 등을 통해서 자신을 독자에게 어필한다. 나를 선택하라고 날개를 펼치는 수컷 공작과도 같다. 그렇게 관심을 받게되면 독자들은 멈춰서서 작가가 누구인지, 출판사가 어디인지 등 다른 외부 정보들을 통해 책을 판단한다. 이 때, 선택 받고 못 받느냐에 따라 새로운 주인을 따라 새로운 집으로 가게될지, 서점이나 도서관 서재에서 그대로 처박혀 있어야할지 결정된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가 덮이기까지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 변덕스러운 독자들은 언제 책을 덮을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제목인 ‘나는 농담이다’ 라는 타이틀은 제목과 커버만으로도 흥미롭다. 김중혁씨는 이동진씨와 하는 빨간책방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되었는데 소설은 처음 읽는다. 책 표지에는 오늘의 젊은 작가 12 라고 적혀있다. 젊은 작가는 몇 살 정도가 되는것일까 싶어 검색해봤더니 71년 생이시다. 젊다는 기준 또한 상대적이다.

이 소설을 ‘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 사이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제 각기이지만, 결국엔 모두가 화해한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두명이다. 그들은 같은 어머니와 다른 아버지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제이다. 형은 이일영, 우주비행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나서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동생 송우영이 태어났다. 그는 컴퓨터 A/S 기사인데 밤에는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하는 남자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후 송우영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어머니의 쓴 편지를 발견한다. 수취인은 이일영이다. 그때 그는 처음 형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리고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여정을 떠나게된다. 형인 이일영은 우주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그는 소원대로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로 나갔지만, 불의의 사고로 우주미아가 되고 만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와 이일영의 이야기를 서로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평행우주속의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설정이 숨어있다. 허지웅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래의 과거’와 ‘오래된 현재’ 의 조우다.

이일영의 애인인 강차연이 그가 실종된 후의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위에서 보니까 누가 찾아온 것 같던데요?”
“그래요? 오늘은 미팅 잡힌 거 없었는데.”
백주호는 연구동 입구 쪽을 보았다. 건물에 가려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강차연은 낯선 사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맥박이 빨라졌다. 머리는 차분하지만 가슴은 뛰었다.
그동안 강차연은 얼마나 많은 ‘만약’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혹시’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번번이 기대와는 다른 결과에 실망했지만 ‘만약’과 ‘혹시’를 떠올리지 않게 될 날이 오는 게 더 두려웠다. 실망하더라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보다는 나았다. 어쩌면 강차연이 기다리는 것은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사라진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153p)

소설이나, 영화나 어떤 때 문득 생각이 나는게 있다. 처음봤을때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면 남는게 있다던가, 앞부분을 다시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처음 시작부분이 스탠드업 코디미라는 생소한 모습이다 보니,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우주 비행사나 수리공이 생활하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 설정과 장치들이 무척 재밌었다.

나는 이 소설을 보다가 갑자기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주연한 ‘클로이(CHLOE)’가 생각났다. 그래서 다시 보았다. 처음 본건 3년 정도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감상평은 Raised by swan의 We were never young 이라는 O.S.T가 흘러나오는 아들의 방 문을 열때의 몽환적인 감각이 다였다.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시 봤을때 이 영화는 완벽한 한편의 ‘소설’이었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할지 모르지만 나의 느낌은 그랬다.

캐서린을 사랑하게 된 클로이

캐서린 집 창밖으로 떨어지는 클로이

  클로이가 떠나고나서야 캐서린은 그녀가 그토록 전달하고 싶었던 헤어핀을 사용한다. 기괴한 집의 이상한 구도 역시 정상을 되찾는 듯한 착각을 준다. ‘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 의 또 다른 형태의 화해일까? 클로이는 일찍 여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캐서린은 남편과 아들의 애정에 대한 갈망을 그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채워넣었다.

남겨질 때, 떠나갈 때, 함께있을 때의 일상에서도 그 각각의 울림들은 우리의 마음을 여러 가지 소리로 울리는 것 같다. 그 사소함, 또는 중대함 속의 의미는 찾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